여성지위 향상에 큰 족적 남긴 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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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지위 향상에 큰 족적 남긴 교육기관
  • 김태현 수습기자
  • 승인 2024.02.2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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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유산을 찾아서 (4) // (상) 여성교육의 효시 ‘이화학당’
이화학당 최초의 한옥교사
이화학당 최초의 한옥교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은 ‘이화학당’이다. 19세기 말 지식인들과 여성들은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거세게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가 여성을 교육하려 해도 남녀가 유별한 유교 사회에서 남녀를 같은 공간에서 가르칠 수 없었다. 이에 여성들만 따로 모아 교육하는 여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시대적 흐름과 사회적 통념이 충돌하는 가운데 이화학당이 1886년 건립됐다. 이는 1899년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사립 여학교인 순성여학교보다 13년, 1908년 개교한 첫 관립 여학교 한성고등여학교보다는 18년 빠르게 설립된 것이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은 1885년 조선 땅을 밟았다. 스크랜튼은 조선에 들어올 때부터 여성들을 교육하고 여성 인권을 신장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여학생 모집을 시작했다. 무료교육과 의식주 제공이라는 조건에도 1년간 인원 모집에 실패했다.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유교 국가 조선에서 서양인 여자가 여학생들을 모아 교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모집에 어려움을 겪던 중 이듬해인 1886년 5월 31일 이화학당에 한 여성이 영어를 배우고 싶다며 제 발로 찾아왔다. 드디어 이화학당의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비록 해당 학생은 건강상의 이유로 3개월 만에 학교를 떠났지만, 역사적인 이화학당의 첫 학생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화여자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은 첫 학생이 찾아왔던 날을 기념해 5월 31일로 지키고 있다. 

어렵게 시작한 교육의 목표는 서구식 근대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보다 나은 한국인’을 키우기 위해 복음을 통한 한국적 인격 양성이 목적이었다. 서양식 교육과 동양의 유교식 교육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교과과정이 진행됐다. 특히 내외관습을 존중하고 조심했다. 교사도 남교사를 배제하고 여교사만 배치했으며, 예배 때도 철저하게 남녀 좌석이 분리됐다.

과목도 성경, 영어, 언문, 한문, 수학, 재봉, 자수 등이 개설돼 서양식 교육과 동양식 교육이 조화를 이뤘고, 학문과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과목이 다 존재해 학생들의 계몽을 이끌어 내고 일상생활을 돌봤다.

이화학당은 1904년 중학과, 1910년에 대학과를 설치해 여성의 지위 향상 및 교육 기회 제공, 한글 보급, 민족 지도자 양성 등 근대화에 기여했다. 특히나 최초의 근대 여의사인 박에스더, 유관순 열사 등 뛰어난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해 우리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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