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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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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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7.0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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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환 목사<천안대 교수>


필자는 새벽기도회와 아침걷기를 끝마치고 정든 교수회관 302호실로 가는 중이다. 회관 돌계단을 오르는데 발길을 멈추게 한 희한한 생명체가 있어 시간을 기꺼이 할애했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유독 그랬다. 바로 돌계단 틈에서 돋아난 풀과 꽃이다. 신기한 일이다. 그 돌계단은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일 센티미터의 틈도 없이 만들어진 계단이다.

필자는 돌계단 사이에 틈이 있는지, 흙이 있는지 유심히 살피고 확인했지만 이렇다할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 한 가지 흙은 보이지 않아도 작은 틈은 있었다. 그렇다면 저 틈 속에 있는 흙에 뿌리를 박은 것이 아닌가. 이 신기한 생명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참을 들여다봤다. 바람에 날아온 씨앗 하나가 어쩌면 돌계단 사이로 굴러들어가 그 박토에 뿌리를 내리고 싹트고 움터 줄기와 잎이 되어 신기한 생명을 구가하는가.

오래 전 강원도 사창리에서 군복무를 할 때의 일이다. 백운산 도로를 통과할 때마다 보고 감탄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절벽 사이에 자리 잡은 소나무였다. 이 소나무는 평지가 아닌 큰 바위로 된 절벽에, 그것도 완전히 누워있는 상태로 매달려있다. 엄동설한 추울 때나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몇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매달려있다. 필자는 그 앞을 통과할 때마다 숙연해진다.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이 바위 저 바위틈에 감고 또 감아 모진 애를 다 쓰는 것을 볼 때, 얄팍한 인생들의 시류에 따른 경박한 삶과 본능의 욕구대로 사는 모습을 대조해 본다.

수십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동남아의 쓰나미 때 동물들은 산에 올라가 살았지만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 들어가 죽었다. 맞다. 동물은 본능대로 자연으로 돌아가 살고 사람들은 아담의 본능대로 즐기려다 어려움을 당했다. 진정한 삶의 근원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옴이 아닌가.

필자는 오늘 아침에 이 신비로운 생명체 앞에서 더욱 숙연해져 시상에 잠긴다. “생명 생명 신비한 생명 고독한 생명. 왜 하필이면 돌계단 틈의 고독한 생명인가. 그래도 나는 너를 찬양한다. 저 산과 들의 호화로운 생명체들보다 네 생명은 더 값있기에...”

그것은 바로 그 생명의 신비가 조물주의 기애다. 필자는 이 아침 더 큰 진리를 깨닫는다. 구원받은 영생의 생명, 진리의 생명이 있음을. 그러나 요사이 강조되고 있는 우리 학원의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생명신학, 생활신학, 우리는 기독교 대학을 만듭시다. 이것들은 다 무슨 말인가. 생명은 살아서 역사한다. 오늘 아침 돌계단의 한 생명체가 교훈하듯이 오 주여 우리 학원, 한국 교회에 생명의 신비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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