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최감은목사 1905-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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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최감은목사 1905-1950
  • 윤영호
  • 승인 2005.01.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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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동지회 주도하며 공산당에 항거


부유한 집안의 장손으로 출생한 최감은목사는 30세까지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전형적인 지주로 살았으나 장로였던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결단이 맞아 떨어지면서 목사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는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생각했고 넉넉한 집안 살림 덕분에 숭실학교를 이미 졸업한 이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9년 제34회로 졸업했다.


안주노회로부터 안수받은 그는, 하지만 이어서 닥칠 고난을 전혀 예견할 수 없었다. 목사로 사역하던 그는 집안에서 이를 축하하며 식송교회를 건립하는 한편 최감은 목사가 사역에 몰두하도록 신암교회를 개척해 전담하게 했을 정도였다.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지원한 결과였다. 당시는 일제시대로 최목사 역시 신사참배를 거부하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교회폐교까지 불사하며 일본의 명령을 거부했을 정도였다. 부유했던 최감은 목사가 이렇게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일제의 패망이 현실로 나타난 이후 북한은 소련군 진출과 공산당 창당으로 또 한번의 혼란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모든 교회를 공산당 휘하에 넣으려는 그들의 작전을 알아차린 최목사는 김윤찬 이유택 김철훈 등 5명의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신앙동지회’를 결성하고 주일총선거 보이콧 등 공산당의 종교정책에 항거하며 주목을 받았다. 강양욱목사가 주도하던 조직구성은 결국  가까운 선배, 후배들이 공산당에 넘어가면서 이루어지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했던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공산당은 그동안 비협조적이던 기독교인들을 일일이 물색하며 잡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최목사는 교인들을 챙기느라 동분서주하다가 그만 체포됐다고 한다. 최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대동강 변에서 자행된 집단총살로 그만 순교의 길을 갔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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