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하늘 향해 목놓아 부르는 이름 '어머니'
상태바
북녘하늘 향해 목놓아 부르는 이름 '어머니'
  • 승인 2001.06.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 어---머---니-----!
목을 놓고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 높여 불러보아도
분명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위에 살고 계시련만
왜 나의 외침을 듣지 못하시는 건지?
아무런 응답이 없구나

지난 8월 평양에서 50여년만에 그렇게도 애타게
그리워하던 어머니 품에 안겼었지만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건만
다시 갈 수가 없구나

불행한 시대 불우한 나라에서 태어나 살기에
비행기로 한 시간도 채 안되는 저 북녘의 우리 땅을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이산가족의 애절한 한을
시원하게 풀 길이 없구나

그래도 나에게는 “기도”라는 것이 있기에
오늘 하루를 보낼 수가 있구나

2001년 3월
장 가 용

2000년 8월 17일 평양 보통강호텔. 남측 이산가족방문단 지원요원 자격으로 참석한 고(故) 장기려선생의 아들 장가용박사(전 서울대 의대 교수)의 마음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죽기 전에 어머니 묘소에 갈 수나 있을런지…

’ 그동안 가슴을 쓸어 내리며 포기한 채 살아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어머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50년만에 뵙는 어머니께 어떻게 인사를 올려야 할까, 왜 이제서야 왔느냐고 혼내시지는 않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묻고 싶은 것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앞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가 있고 감정이 북받친 눈물이 뜨겁게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이성은 떠나고 마치 동물처럼 어머니 목에 코를 대고 온 신경을 모아 어머니의 체취를 빨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와 저는 눈으로 말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얼마나 더 울어야 가슴 깊이 맺힌 한을 시원히 토해낼 수 있을까. 호텔로비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목놓아 내뱉는 애절한 통곡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지나간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모자는 서로의 얼굴을 부비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룻밤이라도 어머니 품에서 보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어머니를 만난 시간은 고작 3시간 남짓. 짧은 시간 뒤엔 또 다른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잘 지내셨냐고 묻고 그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끌어안고 흐느끼기를 반복하는 사이 헤어질 시간이 된 것이다. 어떻게 만난 어머닌데 돌아가야 한다니, 6.25 전쟁 때 헤어졌으면 됐지 또 다시 비참한 생이별을 겪어야만 한다니 장가용박사의 마음은 찢어질듯이 아파왔다. 어머니도 아들과 같은 심정이었는지 인사하고 돌아서는 자식의 등을 향해 체념하듯 입을 여셨다.

“꼭 가야만 하니? 또 만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뵙고 서울로 돌아온 장가용박사의 마음은 한동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 형제간의 우애, 가족의 훈훈한 정을 모두 빼앗기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억울해서만은 아니었다. 어머니를 홀로 버려두고 피난 온 못난 자식이 된 것 같은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서였다. 어머니에게 너무도 죄송했다.

10개월이 지난 지금 장가용박사는 기도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모두를 위해 기도한다. 북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 아내와 자식들과 동료들, 그리고 남과 북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며 화목제를 쌓아 가고 있다.

돌이켜 보니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신이 이제껏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전쟁 중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으며 평생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섬겼던 아버지 고(故) 장기려선생 밑에서 일찍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도 놀라운 은혜였다.

하나님은 평생 소원이었던 어머니와 북의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셨으며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당신이 신앙을 잃지 않았으며 여전히 하나님을 구주로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는 어머니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죄를 용서하시고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민족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시도록 기도하는 것을 남은 생의 소명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사람 한사람이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를 미워하지 않을 때 통일이 이루어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행하는 믿음이 남북평화의 밑거름이 된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고(故) 장기려선생처럼 큰 일을 감당하지 못해도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아파하는 일이 없도록 매순간 그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자로 작은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장가용박사는 종종 명륜중앙교회의 예배광경이 담긴 오래된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에는 찬양대 지휘자였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지휘에 맞춰 피아노 반주를 했던 어머니가 자신을 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천국에서 두 분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소망하며 나직이 기도한다. 남과 북이 하나되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을 볼 수 있도록 장가용박사는 오늘도 간절히 구하고 있다.

구자천기자(jckoo@uc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