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셔
상태바
침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셔
  • 박찬호 교수
  • 승인 2024.03.27 03: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50)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1912~1984)는 스위스에 라브리(L’Abri, “쉼터”) 공동체를 설립하여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제시하려 했던 사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에게 전제주의 변증학을 배웠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쉐퍼의 주장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지면서 그 영향력이 다소 퇴조하고 있지만 C. S. 루이스와 함께 20세기 가장 중요한 기독교 변증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신학적 스펙트럼으로 분류하자면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 중에서도 보다 더 나간 열린 유신론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스콧 버슨과 제리 월즈의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IVP, 2009)는 이들 두 사람의 변증학에 대해 잘 소개하고 있는 훌륭한 책이다. 그 가운데 1972년에 발간된 쉐퍼의『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에 대한 이들의 설명을 소개해본다.

쉐퍼는 서두에서 만일 하나의 세계관이 충분히 포괄적이 되려면 반드시 다루어야 할 세 종류의 철학적 문제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 번째 종류의 문제는 실존의 주제와 관련해서 일어난다. 왜 무(nothing)가 아니라 그 무엇(something)이 존재하는가? 왜 우주는 구조와 질서와 잡다한 것들로 채워져 있는가? 왜 인간은 그 밖의 모든 것과 다른가? 이러한 종류의 질문은 모두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두 번째 종류의 문제는 쉐퍼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과 인간의 딜레마’이다. 인간의 곤궁은 두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인간만이 유독 인격적이면서도 유한하다. 쉐퍼가 표현한 것처럼, 인간은 그 자신으로는 불충분한 통합점인 것이다. 둘째, 인간의 행적과 함께 해왔던 선과 악의 흥미로운 결합 속에서 나타난다. 어떻게 인간은 한편으로는 마더 테레사와 같은 심오한 연민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히틀러와 같은 극악무도한 사악함을 나타내는가? 모든 세계관은 이와 같이 당혹스러운 현상을 설명해야 한다. 왜 인간이 고귀하면서도 잔인한가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면, 우리는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도덕성의 영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종류의 문제는 합리성과 지식에 관련된 쟁점을 다룬다. 어떻게 인간은 합리적 분별을 할 수 있는가? 쉐퍼에 따르면, 이러한 질문은 그의 시대에 중심된 쟁점이었다. 그는 ‘세대 간의 차이’란 더 정확히 말해서 ‘인식론적 차이’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는 인식론의 문제다.

비록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이며, 도덕적이고, 인식론적인 질문들에 대하여 대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쉐퍼는 모든 말과 행위를 종합해 보면 대답은 두 범주 가운데 하나로 분류된다고 보았다. 첫 번째 범주의 대답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생은 철저하게 비합리적이며, 혼돈스럽고, 궁극적으로 부조리하다. 즉 세상은 부인할 수 없는 형식과 질서와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것은 설명이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첫 번째 범주의 대답들이 타당성이 없음을 고려하면서, 쉐퍼는 책에서 다루는 내용의 비중을 두 번째 범주를 고려하는 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즉, 이는 우리의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이며 인식론적인 고민에 대한 논리적이면서 합리적인 대답이 있다는 주장이다. 쉐퍼에게 있어서는 기독교만이 거대한 인식론적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이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이 되어있지만 원래 제목은 거기 계시며 침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지만 아무 말씀을 안 하시고 침묵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막혀 버린다. 그런 면에서 침묵하지 않으시고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이며 인식론적인 고민에 대한 유일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이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신론이나 신학일반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신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