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셋째 주 하늘 문을 여는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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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셋째 주 하늘 문을 여는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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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3.1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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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기 목사/해뜨는교회

하나님 얼굴을 구하라

출애굽기 20:3
찬송: 540장

십계명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너는 내 얼굴 앞에(위에,곁에) 다른 신들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얼굴 위에 다른 신들로 덮지 말라는 의미도 됩니다.
시편에서는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서 친밀함이 생기고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없이 하나님앞에 나와 예배(제사)하였지만, 하나님 얼굴을 찾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에만 열심이었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 보니,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격적인 변화없이 종교적인 행위만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위해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얼굴을 못 찾을 때는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시 143:7)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의 임재 안에서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옵소서!

 

박현욱 목사/창대교회
박현욱 목사/창대교회

유대인의 ‘하루’ 계산법

창세기 1:3~5
찬송: 407장

창세기 1장에 특이한 표현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스라엘 사람은 이 표현에 따라 지금도 하루를 어두운 저녁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밝은 아침을 맞이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이 생각하는 하루의 개념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빛이 창조되기 전에 세상은 어둠입니다. 이 어둠을 저녁으로 유대인은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없던 빛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만든 빛이 암흑을 뚫고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추는 것을 아침이라고 유대인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은 고난 속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고난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유대인은 서로서로 격려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둠이지만, 이제 곧 아침이 올 것입니다.”
기원후 70년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1948년 독립 국가 이스라엘이 설립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2000년 동안 전 세계를 떠돌며 유랑생활을 합니다. 떠돌이 생활 하던 그들에게 절망이 올 때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를 서로 속삭였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현재 상황이 저녁이고 어둠이라면,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빛을 창조하시고 아침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 인생을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아침 같은 삶으로 인도해 주옵소서.

 

황빈 목사/강성교회
황빈 목사/강성교회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말

사무엘상 3:1~21
찬송: 206장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19절). 이런 영적 권세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하나님께 바쳐져 엘리 제사장의 집에서 지내던 어린 사무엘은 한밤중에 여호와의 거듭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5, 6, 8절). 하나님께서 그를 네 번째 부르셨을 때 비로소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대답했습니다(10절). 그 뒤로 사무엘의 삶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귀 기울여 듣는 자’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영적 권세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무엘의 이런 영적 권세의 비결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19). 둘째,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사무엘에게 나타내(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21절).
사실 이 둘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주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시지 않고, 그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사무엘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놀라운 영적 권세를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영적 권세를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주의 말씀의 인도를 받게 하시고, 우리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권세 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신성훈 목사/신일교회
신성훈 목사/신일교회

그리스도의 발자취

베드로전서 2:18~25 
찬송: 398장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주 예수님을 입술과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본이 되심과 그의 거룩한 자취를 따라가겠다는 결단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이 본이란 ‘고난의 본’입니다. 우리가 주의 뜻대로, 주를 위해, 진리대로 섬기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려면 고난이 요구됩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복도 받지만 고난 속에 은혜가 더 많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섬기는 기회도 더 많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시되 남에게 고난을 주거나, 위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 참 길을 찾은 사람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은 복음적 부르심의 삶입니다. 오늘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위험하고 추악하고 피곤한 것은 그만큼 죄가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킹 핀(조향장치 연결장치)과 같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곳입니다.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그 가운데 살 수 없으며, 매일 그 죽음을 확인하고 확증하며, 오직 의에 대하여는 충만히 살아 역사하는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와 그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고 성결하고 복된 삶으로 충만히 회복되길 기원합니다.

 

김영수 목사/소풍교회
김영수 목사/소풍교회

고난 중에서도

누가복음 23:39~43
찬송: 151장

죽지 않아도 되는 예수님이 두 명의 강도 사이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 메달려 고난 중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꼽 만큼도 아니 머리끝을 수 만분의 조각으로 나누어도 찾을 수 없는, 죄와 관계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억울함을 생각하면 세상의 역사 이래 가장 억울한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꺼져가는 생명의 희미한 상황에서도, 한 편의 강도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를 낙원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초청이고, 긍휼이 많은 예수님입니다. 자신의 고통도 돌아보기 어려운 상황,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상황에서도, 한 영혼을 향한 귀한 마음이 은혜이고, 사랑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귀한 사랑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고난 중에도 한 영혼을 생각하신 예수님입니다. 하물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이 세상에 구원받은 사람과 아직 믿음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살피고 계실까?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살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살피시고 돌보시며, 도우실 줄 믿고, 한 편의 강도와 같이 “나를 기억하소서” 하는 마음을 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주신 은혜를 귀히 여기며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피은혜 목사/새창원은혜교회
피은혜 목사/새창원은혜교회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누가복음 23:23
찬송: 38장

세상에는 우리의 귀에 들리는 수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 위로와 격려의 소리, 용기를 주는 소리, 고통의 소리, 슬퍼하는 소리, 절망의 소리들… 또 어떤 소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어 삶을 힘들게 합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 속에 그들의 소리는 ‘이기는 소리’였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주는 참혹한 소리였습니다.
그들의 이긴 소리는 첫째 ‘큰 소리’였습니다. 소리에는 크고 작은 소리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구하는 소리는 큰 소리였고, 빌라도가 참기 힘든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을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소리, 군중들은 내용도 모른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무지한 소리만 질렀습니다. 이 소리가 이겼습니다.
둘째 ‘재촉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큰 소리와 재촉하는 소리는 생각도, 판단도, 이해 할 수도 없는 소리였고, 살인자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그들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무지한 소리가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지한 그들의 소리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소리는 어떠합니까?
사랑의 소리, 복음의 소리, 죄를 이길 수 있는 소리가 우리의 주변에 퍼져나가길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무지한 사람들의 소리 속에 우리가 있지 않고 생명의 소리를 가지고 세상을 살리는 일에 사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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