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믿음을 요청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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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믿음을 요청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 박찬호 교수(백석대학교 조직신학)
  • 승인 2024.02.2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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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프랜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의 <변증신학 강요>(부흥과개혁사, 2017)는 19세기 프린스턴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재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튜레틴이 가르쳤던 제네바 대학은 그 전신이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라고 보면 몇 다리 건너 칼빈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튜레틴이 활동했던 시대는 이른바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였다. 튜레틴은 부패한 인간의 이성뿐 아니라 중생한 인간에게 주어진 건강한 이성도 초자연적 신비의 규범이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성은 신학에 대하여 주도적이고 전제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종적이고 도구적인 관계를 갖는다. 여기에서 튜레틴의 유명한 명언이 등장한다. “이성은 성경을 주관하는 주인 사라가 아니라 성경을 수종 드는 여종 하갈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튜레틴은 이성의 한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이성은 자체를 출처로 삼아 신비들을 끌어낼 수 없고 끌어내서도 안 된다. 그런 권한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갖는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의 신비들을 만나게 된다. “이성이 믿음의 신비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거릴 경우에는 이성을 경청하면 안 된다. 이는 유한이 무한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믿음의 주체를 다룸에 있어서 어떤 결정권을 이성에게 할당할 수 있음을 튜레틴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에 이성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어두워진 이성”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고 건강해진 이성”이어야 한다.

튜레틴은 바울에 대해 해석하며 은혜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기 때문에 이성의 완전한 제거를 바울이 주장하지 않았으며 “다만 이성이 믿음을 섬기고 믿음의 시녀가 되어 믿음을 여주인과 같이 여기며 그것에 순종하되 지배하려 하지 않기를 원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신학적 논쟁에서 이성과 이성의 원리들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용이 우리가 철학과 신학의 혼합과 인간적인 것들과 신적인 것들의 혼합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성과 계시의 관계에 대하여 개혁파 정통주의 스콜라주의자들이 이성에 “신학에 있어서 신앙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여 결국 “계시의 권위 일부를 손상시키는 데로” 인도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성 일반에 주도적 기능을 부여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라고 멀러는 주장하고 있다. 튜레틴은 분명히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신학적 논의가 합리적 논의에 근거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런 상황이 19세기가 되면 달라진다.

튜레틴의 <변증신학 강요>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였던 구 프린스턴 신학자인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앞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나는 합리주의요 또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다. 하지는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이성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하지의 입장은 튜레틴의 입장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지만 하지는 튜레틴을 넘어 이성이 필수적으로 모든 계시에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합리적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참된 존엄성’을 하나님은 존중하신다. 그러기에 “지식 없이 믿고 정신에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참 명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

이어서 하지는 계시의 신빙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이성의 특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불가해한 것을 믿는 믿음을 요청한다는 것을 기독교에 대한 반론으로 주장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지적이다.” 이상의 주장만으로도 하지의 주장은 일정 선을 넘어선 듯한 느낌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하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성이 계시의 증거들을 판단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성경은 충분한 증거의 근거가 없이는 결코 믿음을 요청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주장하고 있다.

하지는 여러 면에서 19세기 미국에서 정통 칼빈주의를 수호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이성관은 시대정신의 과도한 영향 아래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의 입장은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말이기에 경악을 금하지 못하겠다는 강한 비판이 피력되기도 하고, ‘합리적 정통주의’(rational orthodoxy)  또는 ‘초자연주의적 합리주의’(supernatural rationalism) 또는 ‘합리적 정통신학’(rational orthodox theology)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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