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 박사의 영화읽기]금욕과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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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 박사의 영화읽기]금욕과 만찬
  • 최성수 박사(문화선교연구원 칼럼니스트, 캄보디아 선교사)
  • 승인 2024.02.0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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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가브리엘 액셀, 드라마, 1987, 국내에선 1996년에 개봉)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바로 서로 이질적인 것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하이브리드 세상이다. 이 새로운 세상을 무엇이라 규정할지는 보고 느끼는 자에 따라 갈라지겠지만, 나는 그것이 천국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코 어울리지 않고 또 도무지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두 세계가 한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을 촉매로 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로 거듭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덴마크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두 자매 마티나와 필리파는 목사의 딸이다. 경건주의 전통으로 보이는 삶을 이상으로 여기며 금욕적인 삶과 봉사를 실천하며 살고 있다. 경건한 삶의 표본으로 설정된 캐릭터라 생각한다. 두 자매는 부친이 사망한 후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청교도적인 정신을 신앙과 봉사의 삶으로 구현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혁명의 공포로부터 가까스로 피신한 바베트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 두 자매를 찾아온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가족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해준 두 자매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느꼈던 바베트는 정성을 다해 두 자매의 일을 돕는다.

어느 날 바베트는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구매한 복권이 1등으로 당첨되었음을 알게 되고 그 대가로 일만 프랑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받는다. 두 자매는 이제 바베트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으니 그녀가 파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베트는 매우 놀라운 제안을 한다. 두 자매의 부친 목사님의 출생 100주년 기념을 위해 자신이 경비를 지불하여 프랑스식 만찬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바베트의 마지막 만찬으로 여기며 두 자매는 그녀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문제는 평소 사람들을 초대할 때 오직 빵과 커피만을 제공하는 정도로 만족해왔던 두 자매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음식 재료들을 바베트가 마련한 것이다.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이상으로 여기며 살았던 두 자매와 초대된 마을 사람들은 바베트의 화려한 만찬에 현혹되어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던 부친의 종교적 신념이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다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만찬 중에 음식에 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모두가 침묵하며 음식을 먹는 동안 유독 한 장군만은 과거 자신이 프랑스에서 맛본 최고 요리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마을 사람들도 장군의 찬사에 고무되어 말을 하기 시작했고 또한 그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눌러왔던 감각들이 깨어나는 것을 경험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감각의 깨어남이 영혼의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동안 갈등하고 반목하며 서로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했던 사람들에게 변화가 나타난다. 마치 천국에라도 있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마을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며 서로를 배려하고 또 품어주면서 최고의 기쁨을 경험한다.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며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향해 제자들의 일부가 비난을 퍼부었듯이, 불필요한 행위라고 비난받을 수 있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자매에게서 받은 따뜻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이런 경험은 금욕적인 삶이 없이 바베트의 만찬만 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고, 또한 금욕적인 삶만 있고 바베트의 만찬이 없었어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금욕은 만찬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각을 깨우고, 만찬은 금욕을 통해 더 빛나는 의미와 가치를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먹고 마시는 데에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로 나타났음을 보여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한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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