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많이 사랑한 ‘의료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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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많이 사랑한 ‘의료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1.31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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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① 한국 선교의 기점, 호러스 뉴튼 알렌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았다. 한국교회는 이 땅에서 선교 역사 기점을 호러스 뉴튼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선교사로 삼고 있다.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안수받은 선교사이기 때문에 선교의 시작을 1885년부터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알렌 선교사부터 선교 연대를 헤아려 왔다. 교계 전체가 하나가 되어 기념비적으로 추진됐던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대표적이다. 한국 기독교 선교 140년 역사 속 위대한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찾아가는 첫 여정의 문을 알렌 선교사로 여는 이유이다. 

“당신은 하늘에서 왔다”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한 알렌 선교사는 독실한 장로교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미 웨슬리안대학과 마이애미 의대에서 공부한 알렌은 1883년 미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먼저 중국으로 향했다. 일 년 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할 정도로 고전하던 알렌은 1884년 6월 미국 선교부에 선교지 변경을 요청했다. 조선으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한 달 뒤 받은 전보에는 ‘KOREA’만 있었다. 곧바로 9월 20일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 땅에 입국했다. 첫 의료선교사가 이 땅을 밟은 순간이다.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그는 9시간이나 조랑말을 타고 서울에 입성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의사는 선교사로서 확실히 유리했다. 믿을 만한 의사가 오자 미국 공사 푸트부터 반겼다. 푸트는 선교사인지 묻는 고종에게 알렌을 의사로 소개해 부담을 덜어주었다. 

알렌은 국사책에서 들어봤을 법한 조선말 역사적 현장에 있곤 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보수파 민영익이 개화파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자상을 입은 채 독일인 묄렌도르프 집으로 옮겨졌다. 혈관이 손상되면서 위독했다. 알렌이 급히 달려와 수술을 집도하면서, 27개 군데 상처를 봉합했다. 

민영익은 기적처럼 살아났고, 고종을 비롯해 조정 대신들은 알렌을 더욱 신뢰하게 됐다. 생환 후 “당신은 미국이 아니라 하늘에서 왔다”는 민영익의 찬사는 맞는 말이었다. 하나님나라 복음을 들고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알렌 선교사가 갑신정변으로 공격을 받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민영익을 치료하고 있다. 조정 어의들이 깊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지만 알렌 선교사가 성공하며 왕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제중원 설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자료=세브란스병원 역사기록화

선교거점이 된 제중원
조선 땅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술로 인정받은 알렌은 자신이 직접 제안해 1885년 4월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설립 당시 광혜원)을 개원했다. 알렌에 대한 소문이 나자 환자들이 몰렸다. 개원 후 일년 동안 20,529명이나 치료를 받았다. 알렌은 비싼 시계를 들고 와 수술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의약품은 크게 부족했지만, 처방을 받아본 적 없는 조선 사람들은 조금만 약을 써도 금방 나았다. 조선에 주둔해있던 청나라 병사들은 알렌을 ‘예수 박사’라고 불렀다. 알렌에게 복음을 듣고 결단한 사람들도 생겨났다. 치료할 때는 신분 차별이 없었다. 조선의 문화를 고려해 여성 환자를 위한 간호사로 기생을 고용하기도 했다.

역사신학자 박용규 전 교수(총신대)는 “제중원은 초기 한국 선교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도 이곳에서 화학을 가르치며 사역을 준비했다. 제중원 개원으로 알렌은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고종의 신뢰가 참으로 깊었다”고 짚었다. 

하지만 알렌은 동료 선교사들과 불화를 겪기도 했다. 일부 열정적인 선교사들은 법을 어기며 활동할 때 오히려 부작용을 우려한 알렌은 이를 제지했다. 일각에서는 알렌이 선교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조선에 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세계를 향한 발걸음 인도
고종은 평소 신뢰해온 알렌 선교사와 자주 소통했다.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자문을 구하곤 했다. 고종은 미국 워싱턴에 공관을 처음 개설하면서 알렌을 외교관으로 공식 임명했다. 청나라의 각종 방해를 이겨내고 미국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주미 초대공사 박정양이 외교관 신임장을 전달할 수 있었던 데 알렌의 역할이 컸다. 

외교관이 되면서 알렌은 188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외교관으로서 알렌은 고립되어 있던 조선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기초를 다졌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세계박람회에 참여했던 것은 1893년. 알렌은 미국 시카고박람회 개최 소식을 고종에게 먼저 알렸고 한국관을 설치하고 홍보하는 데 조선 사람들보다 적극적이었다. 박람회 전시품은 초라했다. 하지만 낯선 조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는 후했다.

다시 조선에 돌아와 있던 1895년, 일본의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극도의 공포에 내몰린 고종은 선교사들부터 찾았다. 알렌은 언더우드, 헐버트 등 선교사들과 함께 달려왔고, 이들 선교사는 7주 동안 밤낮 당번을 정해 고종을 지켰다. 특히 알렌은 일본의 만행에 분노해 시해 사건의 진상을 해외 언론에 알렸다. 오히려 미국 당국이 알렌을 제지할 정도였다. 이후 고종은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하던 선교사이자 외교관이었던 알렌을 미국 특명전권대사로까지 임명했다. 

알렌은 에비슨 선교사가 세브란스병원을 건립할 때 부지매입을 도왔고, 1904년 개관 때도 직접 참석했다. 그는 미국 정부에 세브란스병원 지원을 간청하기도 했다. 

26세 젊은 나이에 입국했던 알렌은 47세 나이가 된 1905년 6월 9일 다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품에는 고종에게 받은 ‘태극대수장’이 있었다. 배 위에서 알렌은 한참을 울 수밖에 없었다. 알렌은 미국에서 병원을 개업하며, 조선에서 삶과 사역을 33개 상자 분량으로 기록했다. 모든 기록을 뉴욕시립도서관에 기증했던 알렌은 1932년 12월 7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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