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이해는 이성을 넘어 신적 조명까지 이루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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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이해는 이성을 넘어 신적 조명까지 이루어져야
  •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 승인 2024.01.31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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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_44)이성과 믿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꽤나 널리 퍼져 있는 오해가 있다면 그것은 신앙을 반지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는 우리의 지성으로는 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창조는 말할 것도 없고 성육신이나 부활도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다 이해하지 못하는 기적이요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성경은 우리의 지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사건으로 가득하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사건이라든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일,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수많은 기적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한다. 멀리갈 것 없이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서뿐 아니라 요한복음에는 여러 예수님의 기사와 표적이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벳세다 들녘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되심을 오병이어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모름지기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는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있다. 그런 부분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학문이요 철학사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면 실제적인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 학문이나 신학은 공히 하나님을 그 존재 원리로 한다. 하지만 외적 인식의 원리에 있어서는 일반 학문이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면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그 대상으로 한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 가운데서도 성경에 이토록 많은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내적 인식의 원리에 있어서도 일반 학문과 신학은 차이를 드러낸다. 일반 학문에서 내적 인식의 원리는 이성이다. 하지만 신학에서의 내적 인식의 원리는 믿음이다.

인간의 이성은 학문을 연구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이성에 합치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우리는 합리주의 또는 이성주의(rationalism)라 부른다. 바로 근대의 계몽주의는 합리주의의 시대요 이성주의의 시대였다라고 할 수 있다.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여전히 합리주의는 그 위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특별히 과학주의(scientism)라고 하는 세계관은 우리가 조심해야 할 세계관이다. 과학주의는 한 마디로 과학이 제시하는 지식이 전부라고 주장한다. 과학주의에 의하면 종교가 제시하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닌 사이비 지식에 불과하다. 물론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여러 가지 편의를 우리는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조심해야 한다.

이성이 일반 학문의 내적 인식의 원리라면 종교 또는 신학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신학에서 내적 인식의 원리는 믿음이다. 인간은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믿음에 의해 그것을 늘 이전보다 많이 자기 것으로 만들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복종시킴으로써 그것에 응답한다.

기독교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다. 이런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이었다. 안셀름은 사람이 진실로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해는 이성적인 것만이 아닌 신적인 조명을 통한 이해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성적인 것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기독교 신앙은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 또는 신학에는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 분명히 있지만 반(反)이성적인 것을 기독교적인 것이라 오해해서도 안 된다. 신앙주의(fideism)는 덮어놓고 믿자는 구호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성이나 인간의 지성을 배제하는 듯한 주장을 하는데 이는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은 아니다. 물론 신앙과 이성이 배치될 때 우리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을 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신앙과 배치된다면 언제든지 이성적인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의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말하자면 합리주의나 신앙주의가 아닌 합리적 신앙주의(rational fideism)가 우리의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이해를 배제하는 맹목적인 믿음도 지지하지 않지만 반대로 이해되는 것만 믿는다는 입장도 지지하지 않는다. 이성적인 것이라고 무작정 배척하지는 않지만 믿음과 저촉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버릴 용의가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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