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셋째 주 하늘 문을 여는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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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셋째 주 하늘 문을 여는 가정예배
  • 운영자
  • 승인 2023.12.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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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선물

누가복음 2:8~20
찬송: 104장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장악한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종교적 권세를 장악한 ‘대제사장 그룹’과 권력과 경제권을 쥔 정치가 ‘헤롯가문 그룹’입니다. 이 두 세력에 의해 선량한 시민들은 폭력과 악정에 크게 시달렸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 그들의 손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종교와 정치의 손에서 ‘그의 백성을’ 해방키 위해, 새로운 통치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헤롯 대왕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최고의 군사력으로 무장된 곳에, 아무런 무장도 없는 아이로서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인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로 오신 것은 힘 가진 자들의 주도권 때문에, 소외되고 가난하고 피폐해진 사람들을 그 속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 행복을 선물했습니다. 나눔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시작된 가치관입니다. 온 인류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기뻐할 것을 선물했습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메시아는 평화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평화를 담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평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이 세상에 전염시킨 분이십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께 진정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의 최고의 자랑

고린도후서 1:12~14
찬송: 325장

본서를 통해 바울은 자랑이라는 단어를 29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바울은 12절을 통해서 거룩함과 진실함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의 지혜로 사람을 속이는 간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육체를 자랑하지 하지 아니했다고 하는 것은 즉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인간적인 경험과 조건을 앞세우지 아니한 것처럼 오직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성도의 무리)가 그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자신이 아니고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상급이고 자랑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미래의 상급 이것을 믿고 확신하며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자랑을 교훈으로 삼아서 우리도 하나님과 성도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의 자랑은 오직 주님이시고 그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 뽑힌 제자들

마가복음 1:16~20
찬송: 449장

예수님께서 뽑은 제자들은 출신을 알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제자로 거둔 뒤 몸소 본을 보이며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으며 그 일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그 일을 잘해 냈습니다.
세상 눈으로 제자들을 볼 때는 그 수준이 낮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여 기르고 사용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 눈으로 어설퍼 보인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눈으로 볼 때 조금 뒤떨어진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세상 어떤 누구보다도 뛰어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도 말하길 하나님은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없는 자를 택해서 세상의 지혜 자, 강한 자,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그 실제를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약하고 모자란다고 스스로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이 부르시고 쓰시면 제자들처럼 위대한 일을 해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아버지! 제가 바로 미련한 자, 약한 자, 없는 자입니다. 그래도 저를 가르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해 주세요.

 

차고 넘치는 축복

창세기 26:4, 12
찬송: 310장

현재를 만족하지 말고 미래에 더 큰 꿈을 꾸고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환경, 나이, 건강을 논하지 말고 천국 가는 그날까지 멈추지 말고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질 때 축복이 임할까요?
첫째 유산의 신앙자에게 축복이 임합니다. 부모의 신앙으로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아버지)에게 맹세한 약속의 축복이 이삭(자손)에게 임하였습니다. 재물이 아닌 나의 믿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신앙의 본질을 자손과 다음 세대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합니다.
둘째 순종하면 축복이 임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서 새로운 계획(창대한 꿈)을 세우라 하였을 때 ‘아니요, 생각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새벽을 깨워 아들을 바치는 순종을 하니 자손에게 백 배의 축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셋째 약속의 땅에 있을 때 축복이 임합니다. 내 교회관을 가지고 신앙의 뿌리를 내릴 때 차고 넘치는 창대케 하는 축복이 임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물이 있고 생명이 있으므로 형통합니다(시 1:1~2).

•오늘의 기도
차고 넘치는 교회와 가정이 되며 삶이 복이 되고 내 영혼 속에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달려가는 성도가 되길 축복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마태복음 25:19
찬송: 104장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대강절은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열처녀 비유에서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함으로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늘 깨어서 준비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말씀합니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우리 인생은 분명히 결산할 때가 오며,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 맡은 일에 충성함으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모든 민족을 모으고 각각 구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은 보통 낮 동안에 섞여 있던 양과 염소를 밤이 되면 종류를 나누어 우리 안으로 들여보내는데, 모든 민족들을 이렇게 나눌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무엇인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며, 말씀대로 사는 삶을 강조합니다.
마지막 때에 심판의 시간, 결산의 시간, 판결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늘 깨어 준비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오늘의 기도
늘 깨어 준비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립보서 1:19~22
찬송: 484장

바울은 미결수 신분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래서 심적으로 최악의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구원에 대한 확신(19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육체적 구원(감옥 해방)과 영적인 구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거라는 확신이기도 합니다. 상황과 형편에 상관없이 구원이라는 하나님 약속을 붙잡고 있다면,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둘째, ‘살든지 죽든지’ 즉, 내 삶과 죽음을 주께 맡기는(20절)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베드로와 야고보 둘 다 옥에 갇혔지만, 베드로는 감옥에서 풀려났고, 야고보는 처형당했습니다. 사람들은 풀려나는 것만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란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기에, 기도의 결과가 좋든 안 좋든 하나님 뜻을 신뢰하며 나가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셋째, 결국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했던 베드로도, 야고보보다 늦게 죽긴 했지만,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 처형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사나 죽으나 모든 목적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어떤 환경에서도 내 삶과 죽음을 주님께 맡기고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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