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서 교회개척, 어린이 사역…영적자녀 8명 입양
팬데믹 이후 식량 나눠주고 기술학교 세우며 복음 전파
국제코스타 인기강사…매일 10만명에게 말씀 묵상 전해
“제가 사는 곳이 아프리카 차밭 리무르인데요. 현지 꼬마들이 저를 보면 ‘유니스~!’ 목이 터져라 제 이름을 부르며 반겨요. 아이들이 저에게 달라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하지만 제 안에는 ‘얘네들, 신발이 없으니 신발을 사줘야지!’ ‘밥을 하루 한끼 먹는데 빵을 사줄까?’라는 선한 생각이 계속 들어요. 여러분이 기도할 때 ‘주여’ 부르짖으면, 하나님 마음에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에게 다 주고 싶으세요. 여러분의 필요를 왜 모르시겠어요.”
3분 남짓의 이 같은 짧은 메시지로 유튜브 조회수 13만회를 넘기며 큰 은혜를 선물한 주인공 ‘유니스’(Eunice)는 바로 아프리카 케냐 임은미(59·여의도순복음교회 파송) 선교사다.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국제코스타 강사로도 친근한 그는 지난 29년간 아프리카 땅을 소망과 사랑으로 품어온 선교사이자 목사, 교수이자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작가다.
무엇보다 임 선교사는 29년 동안 매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묵상(QT)’을 전 세계 약 10만명의 크리스천들과 나누며 신앙의 도전을 심어주고 있다. “God is good, all the time!”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를 직접 만나 믿음의 여정을 들어보았다.
순종으로 걸어온 길
“순종! 어렵지 않습니다. 순종이 익숙해지면, 불순종이 힘들어집니다.” 인생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난 날부터 신학을 공부하고 아프리카에서 오랜 세월 사역을 감당하기까지 한 평생 묵묵히 순종의 길을 걸어온 임 선교사의 진실한 간증이다.
그러나 지금의 고백 너머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먼저 그의 인생이 180도 뒤바뀌기 시작한 건, 고3 때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밤낮으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한 임 선교사는 대학생 때 참석한 수양회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읽는데, 강력한 회개의 영이 임했습니다. 그동안 별 죄책감 없이 술 마시고 욕을 하던 제 모습이 죄임을 깨닫고 밤새 울며 기도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날의 회심을 계기로 임 선교사는 목적 없이 방황하던 삶을 접고 완전히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1986년 한국CCC 총재이던 김준곤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해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소명으로 확신하고 신학의 길을 결단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신학대에서 인생 최고의 선물이자 동역자인 남편 빌 뉴콤(Bill Newcomb)을 만난 것. 당시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던 임 선교사는 남편과의 첫 데이트에 성경책을 들고 나갔다.
“솔직히 그때는 결혼할 맘이 크지 않아서 ‘내 꿈은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을 증거하는 여자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선포했어요. 한편으로는 ‘이런 나를 당신이 감당할 수 있겠어?’란 뜻이었죠. 그런데 여기에 남편이 ‘Yes’라며, 청혼하는 거예요. 저 역시 ‘빌 뉴콤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흔하지 않은 남자’라는 기도응답을 받아 교제 1년 만에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한몸이 된 부부는 이제 함께 순종의 길에 들어섰다. 그 첫 발걸음이 바로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이었다. 미국 워싱턴 순복음제일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있던 시절, 수양회 강사로 오신 한 아프리카 선교사로부터 제안을 받은 게 발단이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와 달라’는 초청에 사실 우리 부부는 ‘No’라고 답하기로 입을 맞추었어요. 그런데 그 선교사님과 헤어지 직전 셋이서 기도를 하는데 남편이 대뜸 ‘하나님 뜻이면 케냐를 가겠다’는 겁니다. 나중에 대체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사람이 변덕스러운 건 안 좋지만, 하나님의 종이 불순종하는 건 더 안 좋은 것’이라고 대답해서 결국 결심하게 됐죠.”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마침 신혼이라 이사한 아파트에 새로 장만한 가구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안정적인 목회지를 전부 내려놓고 케냐로 떠나야 하는 현실에 잠시 갈등도 일었다. 이런 임 선교사에게 하나님은 따뜻한 위로를 부어주셨다.
“우리가 가진 모든 걸 팔고 아프리카에 가기로 남편과 작정한 뒤 산책을 나섰어요. 그런데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예요. 반대로 눈을 돌려 본 고층 빌딩들은 참 허무하게 느껴졌죠. 세상 부귀영화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임 선교사의 헌신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1994년 파송을 위해 잡힌 여의도순복음교회 고(故) 조용기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프리카는 위험한 곳인데 괜찮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신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하고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곳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케냐에 가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God loves me!
아프리카 땅을 밟은 임 선교사는 서른네 살 나이에 나이로비국제신학대학원(NIST) 최연소 그리고 최초의 여성 교수로 부임했다. 신학교육이 마땅치 않은 곳에서 예비 목회자와 교역자를 양성하는 이 귀한 사역을 그는 무려 9년 동안 기도로 감당했다.
“당시 강의를 위한 영문 참고서적만 16권이었어요. ‘나도 다 이해 못 하는 걸 어떻게 가르칠까’ 싶었지만 기도 밖에 답이 없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를 하면, 학생들의 질문들이 꼭 전날 제가 관심을 갖고 준비한 내용이었어요. 덕분에 저는 최고교수 평가까지 받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영어를 못해 고등학교 졸업에만 5년 5개월이 걸렸다는 임 선교사에게는 기적 같은 역사다. 2006년부터 국제코스타 강사로 전 세계 40여개 국가에서 활약해온 그는 이처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쓰임받은 이야기를 전하며 청년들에게 비전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한편, 임 선교사는 1999년부터 현재까지 현지에 다섯 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정착시키며 어린이 사역에도 구슬땀을 흘렸다. 수십 년째 매주 토요일마다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고, 먹고, 성경공부를 하는 ‘Super Saturday’(토요 천국잔치) 역시 그 일환이다.
“토요 천국잔치는 온종일 밥 한 끼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 굶주린 아이들에게 천국 같은 하루를 선사하고 싶어서 선교 초창기부터 열어온 ‘어린이 전도집회’에요. 특히 성경캠프와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온 아이들에게는 학비와 급식비에 보탤 수 있도록 상금도 줍니다. 감사한 일은 자녀들의 손을 잡고 부모들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이에요.”
이 밖에도 임 선교사는 케냐기독청년연합동맹(SAM) 디렉터로서 아프리카를 복음으로 더욱 굳건히 일으켜 세울 ‘차세대 리더’ 양성에도 힘을 쏟는다. 2021년에는 한동대학교 국제개발협력대학원과 MOU를 맺기도. 그는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가치관을 토대로 교육받은 청년들이 아프리카에 돌아가 빈곤퇴치 및 지역개발 분야의 지도자가 되길 기대한다”고 바랐다.
이렇듯 지난 수십 년간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고군분투해온 임 선교사. 기나긴 세월 만큼 고난의 무게도 상당했을 터. 종족전쟁이 일어나 마을이 피바다를 이룬 때부터 남편 빌 뉴콤이 괴한에게 납치되는 등 목숨을 위협하는 아찔한 상황도 마주해야 했다.
심지어는 현지 목회자들에 의해 교회의 소유권이 넘어간 적도 있었다. 임 선교사는 “그때, 딱 한 번 ‘사역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었다”며 “그래도 주민들이 우리 부부를 대신해 들고일어나 교회를 되찾아주어서 큰 위로를 얻고 고비를 넘겼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프리카 케냐는 치안이 좋지 않다. 특히 외국인들이 쉬운 표적이 된다. 강도를 만나고 납치를 당하는 등 여러 생명의 위협 속에서 우리 부부보다 훨씬 더 열악하게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참 많다”면서 “다행히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중보기도자를 붙여주셔서 우리를 지켜주심에 오히려 감사했다”고 겸손히 말했다.
그런가 하면, 받는 것에 익숙한 현지인들의 마인드는 사역의 실질적인 고충으로 다가왔다. 그럴수록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됐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을 냉장고에 붙이고 따르려고 노력했어요. 여기는 내 부엌, 지극히 작은 자는 아프리카 아이들이죠. 우리 집에 먹을 걸 달라고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또, 작은 예수님이 들어오셨구나!’라고 여기며 섬겼습니다.”
임 선교사는 친딸 수진이와 더불어 8명의 아프리카 아이들을 입양한 엄마로도 유명하다. “어느날 남편이 상의도 없이 우리 교회 중고등부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온 거에요. 다들 부모가 없거나 집이 가난해서 학교를 갈 수 없는 형편이었죠. 그래서 제가 ‘여보, 배 아프지 않고 아이들을 낳게 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고,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선한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에서 수십 년째 영적 자녀들을 거둔 임 선교사. 식비 학비 교통비, 심지어 자립 후 생활비까지 책임지기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장성한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케어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육아를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배웠다. 솔직히 친딸처럼 양딸 양아들을 똑같이 사랑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 양자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한량 없는 은혜를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God loves me!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모든 일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바로 이것이 삶의 문제를 해결할 마스터 키”라며 “하나님이 나를 아프리카 선교사로 부르신 이유도 결국은 연약하고 어리석은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선한 뜻이었다. 아프리카를 위해 내가 간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가 나를 위해 있어 준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됐다”고 전했다.
팬데믹, 위기를 기회로
아프리카를 향한 임 선교사의 열정과 사랑은 현지인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돼 값진 열매를 거두었다. 팬데믹 시기 사역이 더욱 빛을 발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 이를 통해 그는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우선 임 선교사는 코로나19 이후 3년간 매달 약 2만명의 현지인에게 옥수수가루 두 포대씩 나눠주었다. 엄청난 후원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온 덕이다. 아울러 밥을 굶고 등교하는 초등학생 700명에게 날마다 간식을 주며 성경 테이프를 듣게 했다.
“주식인 옥수수가루를 받으려 줄이 끝없이 늘어서요. 한 번에 2시간이면 보급이 다 끝나버립니다. 이 옥수수가루 두포를 구하고자 무려 3시간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갈급하고 고마운 일이죠. 이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전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 가운데 아프리카 경찰국은 “정부도 할 수 없는 일을 선교사가 담당했다”며, 임 선교사가 베푼 호의에 화답해 약 2,400평에 달하는 공터를 맘껏 사용하도록 내어주었다. 2021년 ‘기술학교’는 이렇게 탄생했다.
청소년들의 자립성을 강화할 목적으로 세운 기술학교는 미용·제빵·용접·재봉 등 10개가량의 클래스를 운영 중이다. 지금까지 1,400여명이 수학했다. 예수님을 믿는 기술자들이 되어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이곳에서 성경공부는 단연 필수다.
공터에는 놀이터·축구장·농구장·자전거길 등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놀 공간도 조성했다. 아프리카의 디즈니랜드인 셈인데 실제로 청소년 범죄율이 줄어드는 탈선 방지 효과를 거두면서 아프리카 리무르 경찰로부터 표창도 받았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제 남편에게 와서 울면서 얘기하길 ‘내가 이 공터에서 아들을 마약으로 잃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더 이상 여기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건강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감사하다’는 겁니다. 이제는 아프리카 정부의 허락으로 예배와 설교도 열리고 있거든요. 음지였던 이곳 공터를 양지로 탈바꿈시켜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한편, 임 선교사는 지난 29년간 동행한 하나님의 발자취를 날마다 기록한다. 새벽 4시면 기상해 6시까지 큐티를 하고 묵상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선교사가 된 이래 수십 년째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켜온 영적 습관 덕분에 그는 지금껏 영적 탈진을 경험하지 않았다.
“선교사로서 영성이 퇴보할 것 같아 큐티를 시작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선교지에서는 저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선교사에게 와서 ‘오늘 기도했어? 말씀 읽었어?’ 묻지 않거든요. 저도 선교지에서 별에 별 일을 다 겪었지만 날마다 큐티로 새 힘을 얻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큐티는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이에요.”
그의 묵상(QT)은 매일 오전 임 선교사의 유튜브 채널과 개인 사역 홈페이지 그리고 카카오톡 등 다양한 소통 창구를 통해 10만명의 성도들에게 공유된다. 개인 상담도 쏟아지는 가운데 간증도 속속 생겨났다.
어떤 이는 벼랑 끝에서 생을 마감하려다 그의 큐티를 보고 마음을 돌이켰다. 최근에는 교도소 안 재소자들에게도 전해지고 있는데, 그 수가 600명에 이른다. 이들 사이에서 전도가 일어난 것. 재소자들과 일대일로 매칭된 평신도들은 기꺼이 임 선교사의 큐티를 편지로 써서 부치고 중보하는 일을 자원한다. 이른바 ‘프리즌 리바이벌’(Prison Revival) 사역이다.
임 선교사는 “큐티의 목적은 기승전 복음전파”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심에 큰 은혜를 느낀다. 나의 큐티를 통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바란다”고 소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