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위해 제정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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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위해 제정하신 것
  • 박찬호 교수
  • 승인 2023.10.31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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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_32) 염치 불구하고 성찬을 받으라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성찬식에 앞서 전통적으로 우리가 읽는 고전 11장 23~29절의 말씀은 실존적으로 자기를 살피고 거리낌이 있으면 성찬을 받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되곤 하였다. 하지만 이런 독법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문제가 있는 독법이다.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고 거리낌이 없으면 성찬을 받고 거리낌이 있으면 성찬을 받지 말라는 말은 성찬이 누구에게 필요한지를 오해한 잘못된 주장이다.

특별히 고전 11장 27~29절의 말씀이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공동체적인 함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파당을 지어 서로 싸우는 것이었다. 고전 11장 27~29절을 고전 11장 17~34절이라는 조금 넓은 문맥에서 살펴보면 성찬식에 앞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피라는 의미보다는 공동체를 돌아보라는 그런 의미로 읽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

다행히 최근에 신약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모양이다. 그래서 리처드 헤이스라는 신약신학자는 자신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만찬을 합당하지 않게 먹는 것은 분열을 도발하고(18절), 만찬을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경멸조로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뜻한다”(336)라고 주장하며 “‘몸을 분별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의 영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주의 죽음에 의해 출범된 새 언약에 함께 동참한 사람들에 대해 무심한 채 자신의 사회적 특권만 행사하는 사람들이다”(337)라고 고전 11장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아무런 검토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라고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지나친 패배주의도 조심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과도한 승리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며 거리낌이 있으면 성찬을 안 받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네가 그러고도 구원 얻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끊임없이 송사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사탄의 송사에 대해 자격 없는 우리를 은혜의 자리에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거리끼는 잘못에 대해 회개하고 성찬을 받아야 한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말은 양심도 체면도 없는 사람을 꾸짖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의 신앙과 관련해서는 사탄이 우리에게 던지는 말이 되기도 한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그렇게 엉망으로 살아놓고 성찬을 받으려고 하느냐라고 하는 양심의 소리가 실제로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사탄의 술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염치의 사전적 정의는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십자가를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주소서.”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바울이 각기 자기 자신을 살핀 다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는 것(고전 11:28)을 해석함에 있어 “합당하게 먹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할 때” 빠지게 되는 오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합당하게 먹는다고 말하는데 그 ‘은혜의 상태’를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린 상태라고 해석하게 되면, 이런 주장은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성찬에서 제외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절망과 멸망뿐이다”(IV.17.41).

성찬은 “완전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다. 성찬은 “약한 사람들을 각성시키며 고무하고 자극하며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훈련시키기 위해, 아니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이다(IV.17.42). 그러므로 지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며 거리낌이 있으면 성찬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우리 모두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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