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 “전 세계 최빈국 차드, 복음으로 희망 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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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 “전 세계 최빈국 차드, 복음으로 희망 심습니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3.10.25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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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차드 다음세대 길러내는 오은성·김장섭 선교사
2006년부터 차드 선교, 우물 파며 현지인과 관계
트리니티학교 세우고 복음으로 다음세대 길러내

1인당 GDP가 667달러로 전 세계 195개국 중 183위. 그 뒤를 이은 나라가 북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나라가 얼마나 가난한지 가늠해볼 수 있다. 내전의 상흔으로 나라 곳곳이 황폐화됐고 사막화의 마수가 얼마 남지 않은 녹지를 위협한다. 이름조차 낯선 사람이 많을 이 나라의 이름은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차드다.

지난 12일 연세대에서 열린 언더우드 선교상 시상식에 차드 선교사 한 명이 단상에 올랐다. 주인공은 2006년부터 차드에서 사역해 온 오은성 선교사다. 마실 물조차 부족하고 제대로 된 교육도, 치료도 받기 힘든 이곳에서 오은성 선교사와 김장섭 목사는 식수 펌프로 목을 축일 물을 공급하는 동시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의 물이신 예수를 전한다. 선교상 수상을 위해 잠깐 한국을 방문한 오은성, 김장섭 선교사 부부를 지난 14일 만났다.

오은성, 김장섭 선교사 부부는 차드에 식수 펌프를 설치해 마실 물을 공급하는 동시에 생명의 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오은성, 김장섭 선교사 부부는 차드에 식수 펌프를 설치해 마실 물을 공급하는 동시에 생명의 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선교로 이어진 만남

말하자면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기 전부터 각자 대학생 때 선교사로의 헌신을 결심했다. 교회에서 전도사와 청년으로 만난 그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다. 교제를 하면서도 선교를 향한 마음을 굳혔고 결혼까지 탄탄대로로 이어졌다. 그런데 막상 선교지에 나가려니 현실의 벽이 높았다.

“결혼을 하고 나면 바로 선교지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건이 허락해주질 않았어요. 남편이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땐 교회 개척을 할지 지금이라도 선교지로 나가야 할지 고민이 깊었죠. 하지만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던 당시의 뜨거운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남편 역시 같은 마음이었고 선교를 가자고 마음을 모았어요.”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였다. 여러 후보지가 있었지만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차드 선교사 한 분이 차드 현지인을 데리고 한국을 찾았고 여행 중에 오은성 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우연처럼 보였지만 차드로 부부를 부르시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부르심에 순종한 부부는 이름도 위치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차드 선교를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김장섭 목사는 그때는 참 용감했었다며 웃음지어 보였다.

“아내는 직장을 다니다가 사직을 하고 선교지로 바로 나가려 했는데 생각보다 준비가 많이 필요했어요. 그저 선교를 결단하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죠. 당시 딸 아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오지 선교를 결정하면서도 교육 걱정도 하지 않고 그저 알아서 될 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몰랐고 어떤 계산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미친 짓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광야를 마주하다

직접 마주한 선교지는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는 척박한 광야였다. 우선 한국과는 전혀 다른 기후 환경이 발목을 잡았다. 차드는 1년 내내 여름이 지속되는 데다 가장 더운 계절엔 온도가 50도에 육박한다. 설상가상으로 전기마저 없으니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7~9월은 우기로 분류되지만 포장된 도로가 없는 탓에 비만 내리면 흙길이 진흙탕이 되어 오갈 수단이 사라졌다. 우기가 끝나고 나서도 한, 두 달 정도는 길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차드는 수도인 은자메나에조차 포장도로가 많지 않아요. 비가 내리면 딸이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했어요. 거기다 2008년엔 전쟁이 크게 나서 모든 외국인이 피난을 가야 했죠. 몇달 후에 다시 차드로 돌아왔을 때 딸은 처음보다 더 적응하기 힘들어했어요. 결국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엔 은자메나에서 살림을 폈던 오 선교사 부부는 딸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엔 더 척박한 환경인 남쪽 지방으로 향했다. 그나마 수도엔 최소한의 인프라라도 갖춰져 있다지만 지방은 여전히 부족사회에 머물고 있었다. 정령숭배가 강했고 부족들 간의 갈등도 만만치 않았다. 뿌리 깊은 부족사회 안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려면 시간을 들여 그들의 마음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부족사회는 완전한 관계 문화에요.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꾸준히 마을을 방문하며 친분을 쌓아갔죠.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물이 없다, 병원에 갈 수 없어 지역보건이 필요하다, 학교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중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로 식수 펌프를 설치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만들기 시작한 우물이 벌써 100개가 넘습니다.”

기독학교로 시작된 변화의 바람

오은성, 김장섭 선교사의 사역지는 차드 남부 사르(Sarh)라고 불리는 지역. 차드는 무슬림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지만 워낙 경제 상황이 열악한 터라 도움을 주려는 선교사의 입국을 막지 않는다. 덕분에 남쪽 지방엔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들의 사역으로 교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전수한 신앙은 시간이 지나며 정령숭배와 혼합돼 대물림됐다.

“차드에만 부족이 약 200개 정도 됩니다. 이들은 원래 부족사회로 살았지만 19세기 후반 열강들이 아프리카 지도를 직선으로 그으며 다른 부족과 엮여 국가가 됐죠.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다른 부족을 ‘외국인’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심리적 거리가 멀어요. 이런 부족사회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들에게 접근하기 힘듭니다.”

차드의 몇몇 부족들은 남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인식을 진행한다. 부족만의 고유한 언어를 배우고 종족 표시를 남기는 중요한 행사다. 하지만 짐승 피를 마시고 종교 행위를 하기에 결국 무속 신앙에 가깝다. 선교사들은 참여하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이들조차 부족 문화에 발을 담그고 있기에 부족 행사에서 빠지지 못한다.

오 선교사 부부는 오랜 정령숭배 문화를 바꿀 해답을 교육에서 찾았다. 차드는 합계 출산율이 6명을 넘어 세계 2~3위에 이른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제대로 된 교육기관은 찾기 힘든 실정. 집집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양육하고 복음으로 키워낼 학교가 절실했다.

“처음에 주일학교를 시작하니 수백 명이 몰려왔어요.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주일학교만 할 것이 아니라 학교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복음을 심으면서 차드 공용어인 불어도 가르치고 선한 영향력을 발할 다음세대를 기르기 위해 트리니티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67명의 아이들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지난해 기준 860명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교정을 채운다. 기독교사립학교로 정부에 인가를 받았고 교사들은 모두 사범대 출신이면서 크리스천인 이들로 채용했다. 차드인들은 자녀가 많아 학비를 비싸게 받을 수도 없지만 외부 지원 없이 자립하는 학교로 운영해나가고 있다.

“차드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이곳에 기반시설을 전혀 짓지 않았어요. 심지어 지금도 철도가 없을 정도로요. 학교는 주로 NGO나 선교사들이 설립하긴 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을 매개로 한 후원으로 운영됐던 터라 선교사들이 은퇴한 이후에는 문을 닫거나 국가로 귀속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트리니티학교는 우리 부부가 없더라도 교육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자는 자립 원칙을 세웠죠.”

차드에 선교의 끈을

교육은 당장 눈에 띄는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사역이 아니다.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듯, 건강한 교육의 성과는 적어도 수십 년은 지나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오은성, 김장섭 선교사 부부는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묵묵히 아이들을 섬긴다. 비록 추수가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선교사 부부에게 큰 기쁨이다.

“트리니티학교에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하게 합니다. 한 번은 코로나 전에 한국에서 강사 한 분이 오셔서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아이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물어보셨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대답을 했죠. 강사 목사님이 깜짝 놀랐고 저희도 놀랐습니다. 아이들에게 복음이, 신앙의 유산이 조금씩 심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어요.”

어떤 아이는 유치원 때부터 트리니티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웃음기 가득해야 할 나이임에도 마치 인생을 포기한 것마냥 눈빛이 공허했다. 사정을 알고 보니 부모님이 모두 죽고 겨우 들어간 새로운 가정에서는 다른 아이들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관심을 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자 아이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헤어지는 순간이 왔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차드 어린이들은 워낙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을 많이 겪어 우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눈물이었다.

이제 오은성, 김장섭 선교사 부부 모두 60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 피땀 흘려 일군 선교지이지만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트리니티학교도 현지인들에게 차근차근 이양을 시작하고 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미련을 두지 않고 박수칠 때 떠나자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여전히 차드엔 교회가 없는 마을이 많기에 이들의 영혼을 돌볼 사역자가 절실하다.

“개척한 교회들이 말씀 앞에 서가야 하는데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학교에도 아직 많은 지원이 필요하고 채워져야 할 영역들이 많아요. 소망하기는 저희가 떠나도 신실하게 차드를 섬길 수 있는 사역자들이 세워졌으면 합니다.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고 열악한 경제 상황이 지속되는 차드의 평안을 위해서도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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