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모가 전수한 신앙, 목회의 길로 이끌어
“목회 28년, 더 행복한 신앙공동체의 비전”
교회 개척 후 지금까지 매주 설교한 내용을 한 편의 시로 남기는 목회자가 있다. 성도들이 설교 내용을 잘 기억하고 은혜받을 수 있도록 돕자는 마음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왔다. 주일예배 설교 후 성도들이 시를 직접 낭송하는 시간도 갖고 있다. 시를 써오며 지역 문단에 시인으로 정식 등단까지 했다.
“그저 끄적거림 같은 글이에요. 사실 시라고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인들이 이 말씀은 붙들고 살아가길 바라며 쓰고 있네요. 매주 시 한 편을 창작하는 게 정말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주도 거르지 않고 쓰고 있습니다.”
겸손한 이 시인은 군포평안교회 김응열 목사다. 그의 시에는 성도들을 향한 깊은 애정이 서려 있다. 말씀 선포에 대한 고뇌와 열망을 시 안에 담아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창작의 고통을 앞선다. 그의 목회 이야기에 하나님과 성도들을 향한 깊은 사랑이 묻어난다.
신앙생활 열심히, 사랑 가득
“농사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외할머니께서 돌봐주셨는데, 제가 장손이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겐 외할머니의 신앙이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학교 합격 후 찾아뵈었더니, 할머니가 4살 때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씀을 처음 해주셨습니다.”
김응열 목사는 인천에서 출생했지만,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의 고향 충남 서산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당시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는 외할머니 등에 업혀 교회에 갈 수 있었다. 외삼촌, 외사촌과 함께한 신앙생활이 여전히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서산 해미의 갯마을 학교에서 공부했던 그는 1979년 안양공고에 진학했다. 3년 전체 장학생이었다. 연고도 없던 지역에 진학해서도 외롭지 않았던 건 교회와 함께할 수 있어서였다. 시골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양 원천교회에서 학생회장을 맡았고, 방학이면 시골에 내려가서도 모 교회를 섬겼다. 목사님과 성도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밖에 없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학생에게 주변에선 목사가 될 것을 권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 담임목사님까지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지만, 그는 의외로 주저했다.
“모두가 어려웠잖아요. 청소년들이 주로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님 가정은 특히 어려웠습니다. 쌀이 떨어져 사모님이 라면을 끓여야 했는데, 그런 형편이 싫었습니다. 사업으로 성공해 목사님을 잘 보필하는 장로가 되겠다고 했지만, 목회의 길을 피하려던 핑계였던 거죠.”
목회자로 부르심에 순종
고교 졸업 후에는 행정학을 전공하며 내친김에 행정고시 준비에 돌입했다. 여전히 그에게 교회는 든든한 그루터기였다. 그렇게 안양 평안교회를 출석하던 1985년 어느 날, 한 부흥강사가 그에게 신학교 진학을 적극 권면하는 사건이 있었다.
“한상칠 담임목사님과 금요철야 때마다 청년들과 걸어서 안양 갈멜산기도원을 다녔던 시절입니다. 참 열정적이고 뜨거웠던 때였어요. 부흥강사 분의 조언을 듣고 그때는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방배동 총회신학교에 입학했죠.”
마치 교역자처럼 열심히 교회를 섬기던 그는 신학교를 한 학기 다닌 후 입대해야 했다. 18개월 동안 고향에서 복무하면서도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까지 감당했다. 신학교 복학 후에도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뜨겁게 기도했다.
“신학교 때는 지금도 미소 짓게 하는 추억입니다. 진리축전도 즐거웠고 전국 신학교 축구대회 대표선수로도 나갔습니다. 돈이 없어 점심을 먹지 못해도 전도사님들과 방배동 뒷산에 가서 설교 연습하고 기도했습니다. 1990년 3학년 때는 총학생회 주간 회장도 지냈답니다.”
그에겐 남다른 재능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차트 글씨였다. ‘축 성탄’, ‘축 결혼’ 같은 제도 글씨가 필요할 때 그는 동료 전도사와 선배 목회자의 시무 교회를 다니며 도왔던 것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믿음대로 사는 자녀들이 복
“1989년 한상칠 목사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누굴 추천하는 분이 아닌데 저를 잘 보셨나 봅니다. 담임목사님의 중매는 유일무이했거든요. 아내는 지나치게 활동적인 제가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성적이고 수줍던 아내에게 기도하며 다가가자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안정임 사모와 교회 내 가까운 지인들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교제한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안 사모는 사모가 되겠다는 꿈을 이룬 순간이었다. 어려운 목회환경 속에서도 자녀들도 잘 자라주었다. 지금은 첫째 딸도 사모의 길을 걷고 있다. 둘째 딸은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고 어린이집에 근무하고 있고, 환경에너지 관련 박사를 준비하고 있는 아들도 말씀으로 하루를 열고 있다. 자녀들이 김 목사에게는 자부심이자 보람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생활은 엄격하게 지도했습니다. 수요예배까지 철두철미했어요. 그러나 다른 면에서 열심히 소통하려고 친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을 보면, 그래도 내가 실패하지 않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김 목사의 영향으로 부모와 형제들까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그는 가정 복음화의 씨앗이었다.
새 비전, 신앙의 터 세우기
1995년 12월 오랫동안 시무하던 평안교회를 사임했다. 기도하고 준비하던 개척의 길을 걷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한 달 동안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 상가를 얻어 군포평안교회의 문을 열었다. 2년이 안 되어 교회는 부흥하게 되었고, 1999년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걸어온 목회 28년. 이제 예순을 넘어가면서 김응열 목사는 목회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영혼 중심의 목회에 전념하며 걸어왔다. 이제는 군포평안교회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도록 다음세대 예배 터전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섬기는 목사가 되겠다며 달려왔습니다. 성도들이 소통하며 행복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관계 전도에 더욱 집중할 계획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코로나 영향으로 교회에 못 나오는 어르신들을 더 찾아뵈려고 합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가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의 모판이 될 수 있도록 사역의 변화를 모색할 계획입니다.”
김응열 목사는 총회 상비부서뿐 아니라 총회 임원으로도 사역했다. 동료 목회자들은 무슨 일을 맡겨도 성실하고 꼼꼼하고 책임감 있게 감당하는 그와 함께 일하길 좋아한다.
김 목사는 만학도로서 자기 성장을 위한 공부도 매진하고 있다. 현재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과정을 마무리하며 행정목회의 비전을 이뤄가고 있다.
“향후 1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행정목회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 7대 실천운동을 중심으로 영의 행정을 펼치는 것이 제 목회의 방향입니다. 후배들이 제가 닦아놓은 행정목회 기반 위에 원활하게 사역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이인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