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든든한 중보기도가 일본 목회의 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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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든든한 중보기도가 일본 목회의 동력입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3.08.3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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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목회하는 임완혁 목사(센다이 나가마치교회)

일본기독교단 소속으로 시골에서 목회사명 감당
한국식 열정과 기도로 일본 성도들 변화 이끌어

“삼형제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에 나가야 했고, 토요일에도 교회 청소를 도맡았습니다. 집안은 어려운데 교회 건축까지…. 우리가 목사 아들이냐고 아버지에게 반항도 해봤지요. 그래도 돌이켜보니 아버지의 신앙훈련은 우리 형제에게 큰 자양분이었습니다.”

일본기독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현재 센다이현 나가마치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임완혁 목사. 군 제대 후 지금의 백석대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일본에서 목회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낯선 땅에서 헌신적으로 목회를 할 수 있는 힘은 아버지 임현숙 목사와 어머니 서경자 사모, 형 임요한 목사, 동생 임완익 목사와 함께했던 역경 속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초 임완혁 목사가 모처럼 고국을 찾아 아흔을 넘긴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뵙고 형제들과 해후했다. 

아버지가 개척한 한영교회에서 나누는 형제의 대화에서는 혹독했던 아버지의 신앙교육에 대한 에피소드가 넘쳐났다. 요란하지 않게 나누는 대화 속에서 서로를 향한 신뢰가 느껴진다. 임 목사는 “목회하면서도 가족의 기도가 있다는 것이 항상 외롭지 않도록 지지해주고 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 임현숙 목사와 세 아들 요한, 완혁, 완익 목사(오른쪽부터)는 백석 가족이다. 둘째 임완혁 목사는 가족의 든든한 기도 후원으로 일본에서 목회하고 있다.
아버지 임현숙 목사와 세 아들 요한, 완혁, 완익 목사(오른쪽부터)는 백석 가족이다. 둘째 임완혁 목사는 가족의 든든한 기도 후원으로 일본에서 목회하고 있다.

뜻밖에 일본으로 부르신 하나님
임완혁 목사가 러시아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때는 중학교 여름수련회에서였다. 세르기 코르다코프의 ‘핍박자’를 읽고는 기꺼이 순교의 각오로 ‘소련’으로 가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신앙을 거부한 때도 있었다. 다시 사명을 확인한 것은 군대에서였다. 

“전방 수색대에 복무하면서 DMZ 정찰을 나가곤 했습니다. 지뢰를 밟는 사고가 날 정도로 위험했기 때문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어요. 교회가 없는 곳이라 부대원들을 모아 제가 말씀을 인도했습니다. 작전 나가기 전에 병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요. 입대 전 어머니가 주셨던 포켓 성경도 틈날 때마다 화장실에서 읽었습니다.”

1989년 제대 후 백석대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뒤늦게 신학공부를 하고 형님이 진학했던 백석에서 공부하는 건 당연했다. 나중에는 동생도 백석대 신대원에서 공부해 사부자가 백석인이 됐다. 

그런데 임완혁 목사는 뜻하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 무심코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가 일본의 신학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알아보니 일본 신학의 깊이가 상당했고, 특히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저술한 세계적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 교수님에게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일본을 향해 도전을 선택했다.

당장 일본어부터 익혀야 했다. 기타모리 가조 교수가 은퇴했지만, 강의를 맡고 있어서 다행히 배울 기회를 얻었다. 동경신학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지바에 있는 신학교에서 일 년 동안 청강하기도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멈출 수 없었지만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으로 버텨냈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했던 공부는 목회를 하면서도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는 동경신학대학교 학부 4년, 대학원 2년을 거쳐 2005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일본그리스도교단에 정식 가입을 위해서는 교단 소속 교회에서 3년 동안 시무해야 한다. 부교역자로 3년 동안 사역한 후 단독 목회도 가능했다. 

“시즈오카의 쿠사부카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수요일 오전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80대 이상 성도님들이 무척 사랑해주셨어요. 일제 강점기에도 일왕보다 하나님이 우선이라고 고백하다 큰 핍박을 받았던 어른들입니다. 그분들을 만나고 일본에서 목회하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신학생일 때 2번은 한달 동안 지방에서 의무적으로 사역해야 했다. 전도사 신분이었던 그는 6개나 되는 농촌교회를 맡았다. 대부분 교인은 2~3명만 남아 있을 뿐 시무 목사가 없는 교회였다. 전도사가 한 달에 한번 가야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다. 이런 현실이 그를 일본 목회로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부교역자 3년 시무 후 그는 3년 동안 독일로 가서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종교개혁과 루터교회를 깊이 배울 수 있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기도가 먼저라고 가르쳤습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동경신학대학교 학장의 추천을 받아 와카야마현 고보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불교색이 강한 지역으로 교회 성도 수는 23명 내외였다.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 교회와 유치원 건물이 낡아 건축이 필요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기준이 강화되면서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교인 수가 많지 않은 데다 시골이고, 교인들도 연로해 재정 여력이 부족했다. 1억엔이 필요한데 2천만엔 뿐이었다. 임 목사는 일단 교회와 유치원을 알리자는 생각에 오사와치에 사모와 함께 전단지 2만장을 인쇄해 집집마다 붙이고 다녔다. 전단지에는 교회 이름을 새긴 볼펜도 달았다. 그야말로 한국 방식이다. 

변하지 않는 성도들의 신앙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임 목사는 “세상 기업은 돈이 생겨야 예산과 계획을 세운 후 건축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기도가 먼저”라고 강조하면서 기도의 열정에 불을 붙였다. 3년 동안 말씀과 기도로 교인들의 신앙 성장을 도왔다. 그리고 임 목사가 먼저 100만엔을 약정하자 6명의 장로들이 헌신하면서 금방 1천만엔이 걷혔다. 건축이 본격 진행됐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교인들 스스로 느낀 겁니다. 일본 관례에 따라 전국 교회를 향해 기도편지도 보냈습니다. 결국은 빚 하나 없이 우선 유치원 건축을 마쳤고, 다음으로 5천 만엔을 들여 안전진단을 통과할 정도로 교회를 개축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진짜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한 것이죠.”

임 목사는 원거리를 마다않고 심방을 다녔다. 걷기를 좋아해서 왕복 8시간 거리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갔다. 지역 주민들과도 적극 소통하는 길을 열었고, 3층 목사관은 쓰나미가 닥칠 때 걷기 힘든 노인들을 위해 피난처로 오픈했다. 교회는 주민들에게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일본 교회 앞에서 임완혁 목사
일본 센다이 나가마치교회 앞에서 임완혁 목사

“큰일 나겠다 싶어 새 목회지 구했죠”
평탄하게 목회할 법도 한데 임완혁 목사에게 큰 부담이 생겼다. 

“교인들은 항상 제 목회 방향을 찬성해지고 지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저를 예수님 바라보듯 하는 것 같이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큰일 나겠다 싶어 하나님께 새 목회지를 허락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응답됐다. 임지는 뜻밖에도 1,000Km 떨어진 동북부 센다이현이었다. 센다이의 한 교회에서 목회자가 갑자기 사임해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보교회를 사임한다는 소식에 교인들은 충격을 받았죠. 그래도 좋은 교회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마지막 설교 때에는 지역 주민들까지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찾아와 환송해주었습니다. 감사하고 감동이었습니다.” 

센다이는 뜻밖이었지만, 실은 임완혁 목사가 일 년 동안 매달 한 차례 지진 복구를 위해 자원봉사를 다니던 곳이었다. 나가마치교회는 교인 약 60명으로 이전보다 규모는 컸지만, 공동의회를 하면서 청빙에 반대하는 교인들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임으로 계셨던 유명 목회자의 자손들이 반대의 주축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원로목사님이 어디 계시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겁니다. 목회실에서 노인요양시설 전단지를 보고는 무작정 그곳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토요일이었는데 아흔이 넘은 목사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 단정하게 차려입고 어서 오라고 맞아주셨습니다. 그날 참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96세였던 원로목사는 처음 만난 후임에게 젊었을 때부터 유학시절, 목회 경험 등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마지막에는 축복기도까지 해주었다. 또 오겠다고 인사하는 후임을 엘리베이터까지 마중하며 손 인사도 건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장례예배를 인도하면서 원로께서 전해주셨던 말씀을 유언처럼 유가족과 교인들에게 나눴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은혜가 넘쳤고, 저를 향한 가족들의 시선도 완전히 바뀌었죠. 은혜였습니다.”

철저한 신앙훈련으로 삼형제를 목회자로 길러낸 아버지 임현숙 목사
철저한 신앙훈련으로 삼형제를 목회자로 길러낸 아버지 임현숙 목사

“우리 4부자는 백석가족입니다”
일본에서 임완혁 목사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거부하는 경험도 했다. 그래도 흔들림이 없다. 한국에서 어렵게 살던 시절 굳게 신앙을 지켜냈던 가족과의 체험이 그에게는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일찌감치 세 아들을 목회자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그리고 사부자 목회자라는 영광과 은혜를 누리고 있다. 이런 가족의 신앙과 중보기도가 임완혁 목사를 지지하며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코로나19 3년 동안 일본에서도 온라인으로 전환한 교회가 많았다. 그러나 나가마치교회는 한번도 현장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이라면 더욱 쉽지 않았지만 임 목사는 확고했다. 

임완혁 목사는 특별히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두 형제를 키워준 큰 형님 임요한 목사를 향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형님이 부모님 같다는 느낌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목회뿐 아니라 여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교단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고 느끼곤 합니다. 올해 백석총회 45주년 준비위원회에서 상임총무로 섬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사부자는 백석 가족입니다. 45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이후 더욱 도약하는 교단이 되길 일본에서도 응원하고 중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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