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로 부르신 주님, 생각만 해도 위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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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 부르신 주님, 생각만 해도 위로가 됩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3.08.15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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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동부노회장 김학식 목사(애틀란타경서교회)

고교 때 2번 자살 시도, 서른에 다시 만난 하나님
“이민자 목회 어렵지만, 주님과 언제나 도전할 것”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려고 자살 시도를 한 것 같아요. 과수원에 있던 농약병을 바로 털어 넣어버렸어요. 그런데 사용한 농약병에 물을 타 놓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이 있으셔서 살려주신 거죠.”

미주동부노회장 김학식 목사(애틀란타경서교회)는 경기도 청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은 무척이나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비교 대상이었던 형은 늘 전교 1등이었다. 서울로 진학한 형을 아버지는 지나치게 편애했다. 어머니마저 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떠나며 온갖 집안일은 둘째 아들의 독차지가 됐다. 승부욕이강했던 만큼 좌절감도 컸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저도 인문계고에 진학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실업계 학교에 가라는 겁니다. 실은 제게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나들은 시집가고 아버지와 여동생, 저만 같이 사는데 중2 때부터 밥하고 짐승들까지 돌봐야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아주 많이 받았어요.”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했고 그리웠다. 중3이 되어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데 부모님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 실업계고에 진학하면서 인생을 포기하는 듯 생활했다. 고교 입학 후 2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것도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 때문이었다. 늘 억울하고 분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공부는 더 멀어졌고 스스로 내면은 곪아갔다. 그래도 부모님이 형식적으로라도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꾸준히 나가는 편이었다. 그러다 고3 때 교회 내 큰 분란을 보고 완전히 교회를 떠났다. 돌아오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애틀란타경서교회 김학식 목사는 20년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을 위해 목회자로 부르신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생명의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남자들은 군대에 다녀오면 정신을 차린다고 했던가. 대학은 못갔지만 제대 후 김학식 목사는 마음을 다잡고자 노력했다. 현악기를 수입해 중개하는 직장을 다녔다. 당시는 생활 습관부터 바로잡으려고 무척이나 애쓰던 시기였다. 성격도 외향적으로 바꾸려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스포츠 활동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는 자기중심적이었지만, 이제는 자기잘못도 인정하게 됐다.

“30살이었어요. 전도를 받고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한 때가. 수원시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예수님이 생명이고 구원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도 그 단순한 사실을 왜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이후 생각할수록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던 선생님들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다음세대 신앙교육을 신경쓸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그가 다니던 교회는 엄격한 분위기였다. 중학교 때 방언의 은사를 받은 기억이 있지만, 교회에서 방언기도를 하는 건 어려웠다. 그저 하나님이 아버지면 성령님은 삼촌인가 싶을 정도로 어린 시절 신앙교육은 부족했다. 결국 은사는 사라졌고, 제대로 신앙을 배우지 못한 채 교회와 멀어졌다.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보니 청소년기 부족했던 신앙 훈련이 아쉽게 느껴졌다. 

집사 직분을 받고 그렇게 피우던 담배도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술마시고 당구치고 사냥을 다니던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러다 여름성경학교를 하면서 평생 배필을 만났다. 젊은 여전도사였다. 

“부천에서 교회들이 연합해 여름성경학교를 하는데, 앞에서 예쁘게 잘하는 모습에 반했습니다. 누군가를 대신해 참석했다가  우연찮게 좋아하는 사람을 찾게 된 겁니다. 제가 평신도 집사였기 때문에 사귀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들도 여럿이었죠. 그런데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던 제목과 딱 맞는 사람이라는 걸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의 소명도 받게 되었고요.”

기도원에서 목회자로 부르심에 대해 집중기도하며 신학을 결심했고 먼저 34살 나이에 결혼에 골인했다. 이전 중학교 2학년 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기억도 있다. 김 목사는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목사가 되었다고 말한곤 한다”며 “처음 신학을 공부한 이후 오로지 목회에만 마음의 중심을 두고 공부에 매진했다”고 회고했다. 

합동측 한 신학교에서 학부를 공부하고 교수진이 훌륭하다는 추천을 받아 방배동 백석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당시 기독신학교 신대원이다. 아내는 그보다 10년 먼저 총신대를 졸업한 전도사였다. 그는 1학년 2학기부터 꾸준히 부교역자로 사역하며 열정적으로 목회 훈련에 전념했던 시기이다. 여러 부교역자들 중에서도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남달랐던 시기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

고난을 넘어 견고해지는 목회
지금 김학식 목사가 미국에서 목회할 것이라고는 당시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미국으로 오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목회하고픈 마음이 컸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리 미국으로 누나와 어머니를 옮기시고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조급하게 하셔서 자신을 미국으로 보내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2002년 9월 5일 첫발을 디딘 곳이 현재 목회지 동부 애틀란타였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구원해주시고자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위로가 됩니다. 미국에 와서 야간에 건물 청소를 하고 페인트칠 일도 하면서 밑바닥 이민자의 삶을 경험했습니다. 일하면서도 집에서 우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이민 목회 현장에서 교회는 일찍 부흥했다. 불과 몇년 만에 120여명으로 교인이 늘었다. LA와 같이 한인이 100만명 이상인 지역과 비교하면 10분 1에 미치지 않는 애틀란타에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교회 성장과 별개로 시련과 도전은 항상 찾아왔다.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기도 하고, 기댈 곳 없는 타지역 목회자가 교회에 출석하도록 돕고 배려했는데 정작 그는 뒤로 교인을 빼가기도 했다. 사방이 적이구나 싶을 정도 산전수전을 겪어야 했다. 너무 착하기만 했던 그는 억울한 일이 많았지만, 그것이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고난을 이길 내성도 길렀습니다. 지난해 다시 교회를 개척하고 50여명 성도들과 자립하고 있습니다. 다시 개척하라면 못하겠다는 분들이 미국에는 많은데 저는 개척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싶으면 저는 지금도 다 내려놓고 개척할 겁니다.”

김학식 목사는 어려움과 위기를 겪을수록 견고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좌절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워지며 뜻을 찾는다. 경험과 노하우가 이민자 목회를 위한 자양분이 됐다. 

“우리 교회는 삶의 변화, 생활 전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 말씀을 많이 읽으면서 성령께서 내 삶을 변화시켜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특별히 개혁주의생명신학과 관련된 좋은 교재들을 알게 됐는데, 성도들과 차근차근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김학식 목사는 지난 4월 미주동부노회 노회장으로 선출돼 노회원들을 섬기고 있다.  처음 노회에 관심이 없었던 그도 노회활동이 큰 활력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는 노회원들을 더 잘 섬기려고 노력 중이다. 그는 노회원 간 친교와 화합을 최우선에 두고 있다. 김 목사는 목회 은퇴 후에는 스포츠를 접목한 선교 사역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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