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선교의 방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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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선교의 방관자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3.06.21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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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의 첫 만남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었다. 당시로서는 캠퍼스 뒷산보다 커 보였던 선교비 2백만원을 모금하기 위해 온 정성을 들여 선교편지를 작성하고 교회 집사님들을 만나곤 했다.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의 긴장과는 다르게 현지 대학생들을 마주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니 오히려 한국에서 사영리를 들고 캠퍼스를 돌아다닐 때보다 자신감이 붙었다. 쭈뼛쭈뼛 교정을 헤매는 외국인을 반갑게 맞이해준 일본 대학생들의 친절함이 마음을 녹였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역만리 외국이라는 점이 도리어 용기를 불어넣어 줬던 것 같다.

졸업 이후 잊고 있던 선교와 재회한 것은 교계 기자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수습기자 교육을 마친 이후 줄곧 선교계에 출입하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선교사님들을 적잖이 만났다. 감사하게 직접 선교 현장을 살펴볼 귀한 경험도 수차례 주어졌다. 관성과 열정이 뒤섞여 현장을 누비다보니 선교를 주제로 작성한 기사만 해도 벌써 수십 페이지를 훌쩍 넘겼다.

지난주 개최된 세계선교전략회의 NCOWE에도 선교기자의 자격으로 현장에 함께 했다. 선언문을 살피던 중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의 선교”라는 문장이 뇌리에 박혔다. 사실 낯선 표현은 아니다. 모든 성도가 각자의 자리에서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 함은 기사로도 꾸준히 다뤄왔던 주제였다. 그럼에도 유달리 인상 깊었던 이유는 수없이 기사로 작성했던 ‘모든 성도’에 나 자신은 철저히 배제되어있었음을 새삼 깨달아서다.

평신도치고는 여느 누구보다 선교와 가까웠던 환경이다. 마음만 먹으면 선교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여태껏 셀 수도 없이 타이핑 했던 선교의 방관자요 기계적 전달자에 불과했다. 윤동주 시인은 육첩방 남의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음에 부끄러웠다지만 나는 모든 환경이 주어졌음에도 선교하지 못했음에 부끄러웠다.

오늘의 기자수첩은 나태했던 방관자의 고백록이다. ‘선교’라는 두 음절 다섯 개의 자음, 모음을 힘주어 누르며 다시 한번 되뇐다. 다른 누가 아닌 내가 선교사임을. 바다 건너 먼 땅만이 아닌 발 디딘 이곳이 바로 선교지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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