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마리아 길’이 뜻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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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마리아 길’이 뜻하는 것은
  • 주도홍 교수 (기독교통일학회 초대회장, 전 백석대 부총장)
  • 승인 2023.06.1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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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고 // 정전협정 70주년,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
예수님께서 강한 반대를 뚫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처럼 한국교회도 평화와 통일로 가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속주의의 도전 앞에 복음의 옮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 날로 심화되는 빈부의 문제, 노사의 충돌,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 죽일 듯 싸우는 정치권의 분쟁, 고독사, 살인, 마약, 중심을 잡지 못하는 청소년의 문제와 심지어 소수자 인권의 문제까지 … 그동안 급격한 성장을 겪으면서 구축된 부자들을 위한 종교,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종교, 권력자를 옹호하는 종교의 자리에서 내려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인권과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다시 세상을 복음으로 바꾸고자 하는 열망으로 낮은 자들과 함께 근면하고 검소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2023년 6월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의 대표회장단(대표:이영훈)이 3부로 이루어진 ‘정전협정 70주년 목회서신’을 내놓았습니다. 제3부 적용 부분 사회문제에서 성경에 입각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한교총은 ‘정전 70주년 목회서신’에서 어떻게 민족의 한(恨)인 남북의 분단을 넘어서서 성경적으로 평화통일로 나아가야 할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향한 세상의 깊은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선지자적 외침이 없습니다.

이는 통일 대화가 사라진 오늘의 남북관계를 닮았습니다. 한국전쟁 6.25 73주년을 맞으며, 어두운 분단 현실을 극복하는 평화통일을 성경적으로 생각해보는 일은 당연하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며, 그를 믿는 크리스천은 ‘평화의 사도들’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19)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비전을 보여줍니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멀리해야 할’ 땅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당시 400년 이상 갈라져 살았습니다. 21세기 분단의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처럼 그들도 여러 면에서 분단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분단의 삶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고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마리아로 가려는 예수님의 모습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본인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4). 영어는 이 부분을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로 번역하는데, 예수님이 ‘지금 나는 꼭 사마리아로 통과하여 가겠다’라고 말했다는 제삼자의 간접인용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싫어해서 상종하지 않으려고 돌아가는 먼 길을 택했습니다. 미움과 그로 인한 분열은 언제나 그 대가를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유대인의 모습이 예수님에게는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의 길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그런 모습을 따라 순응하며 적당히 살았다면, 보통 유대인은 될지언정 우리가 따라야 길과 진리 되신 생명의 주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강한 반대를 뚫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한낮 정오 우물가에서 세상과 단절한 불쌍한 수가성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에게 유대 남자 예수님과의 만남은 놀람 그 자체였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 성경은 사마리아 여인의 물음의 배경을 설명합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 4:9)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특별한 만남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로 대화가 이어졌고, 나아가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가 바로 이때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사람이 그리고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 곧 이 때라”(요 4:23)는 선포였습니다. 이 만남은 역시 제자들에게도 “이상한” 일이었고,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당황 그 자체였습니다.(요 4:27) 

언제나 사람들은 본인들의 삶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판단은 예외 없이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그러한 삶을 정상으로, 옳음으로 간주하고, 남을 망설임 없이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마리아 여인과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 예들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음식이 모든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결국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요 4:39)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요 4:41)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처럼 다른 차원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모습이 성경적이요, 복음적입니다. 그를 따르는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어의 ‘작은 그리스도’ 크리스천(Christ+ian)이, 독일어의 크리스트(Christ)가 됩니다.  

한국의 분단을 바라보는 한국교회가 과연 사마리아로 들어가시고, 기꺼이 사마리아인들과 이틀 밤을 같이 생활하면서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셨던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당황하고 이상히 여기며 심지어 오해하고 정죄하는 사람들로 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지? 진리요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그들의 상식과 생각, 굳은 전통을 따라야만 한다면, 사마리아와의 평화도, 사마리아의 구원도, 영생의 샘물도, 진정한 예배의 때도 놓치고 말 것입니다.

과연 성도의 길이 무엇인가를 요한복음 4장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분단의 아픔 가운데 살아가는 한국교회가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많은 오해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의 왜곡된 삶의 현장에서 생생히 구현하길 소망합니다. 그럴 때 썩어져 가고 어두워져 가는 세상은 소금과 빛을 만나며 새로운 환희와 비전을 그리고 삶의 에너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북한을 향해 성령의 열매 디아코니아(섬김)로 ‘놀랍게’ ‘이상하게’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한 8:32) 아멘.         
     

주도홍 교수(기독교통일학회 초대회장, 전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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