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목사 순례기념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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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 순례기념관(2)
  • 최순호 장로(원천교회)
  • 승인 2023.04.19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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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함께하는 행복한 성지순례4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한반도는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패거리를 거느리고 평양 시내를 활보하던 이기풍은 ‘예수 믿으세요’라는 이상한 발음으로 전도를 하던 서양선교사를 발견하고 돌멩이를 집어 던져 턱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을까 주님 앞에 나온 이기풍은 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뒤 한국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한국 최초의 파송 선교사가 되어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에서 제주 성안 교회를 비롯해 3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1918년 전라도 노회의 부름을 받아 광주 북문안 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 1923년 다시 전남 순천 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한 뒤 1927년 다시 제주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었다. 1933년 전남 벌교교회, 1934년 칠순 노구의 몸으로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산간벽지인 여수군 남면 우학리 작은 섬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돌산, 안도 등 근처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었던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이기풍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정면으로 맞섰다. 1940년 11월 15일 여수경찰서에 수감되어 70이 넘은 나이에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했다. 광주 형무소로 압송되기 전 쓰러져 병보석으로 출감했지만 망가진 몸을 회복하지 못했다. 끝내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1942년 6월 20일 78세의 나이로 마지막 복음을 전했던 우학리 교회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오금도에 내려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를 감상하면서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우학리교회’에 도착한다. 하얀 대리석에 네모난 창문이 하늘색과 같은 코발트. 교회가 파란 하늘에 담겨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우측에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비’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순교기념비 옆으로 난 작은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이기풍목사 순교기념관’이 있다.

우학리교회 100주년 기념관이기도 한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은 공사 관계로 자료를 살펴볼 수 없었다. 현재 순교기념관에는 이기풍 목사의 자필로 기록한 당회록 등 자료들이 있다고 한다. 순교기념관 표지석 앞에 잠시 앉아 남도의 끝자락에서 시작한 봄바람을 느껴본다. 남단에서 시작한 꽃소식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한반도를 은혜의 땅으로 품어주시길 기도해본다.

우학리교회 앞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비.
우학리교회 앞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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