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와 같던 영혼이 성장하는 모습 볼 때 사모로서 가장 큰 감격”
상태바
“어린아이와 같던 영혼이 성장하는 모습 볼 때 사모로서 가장 큰 감격”
  • 정하라 기자
  • 승인 2023.02.01 0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독교연합신문 35주년 창간특집// 대전 평강교회 김경희 사모를 만나다
35살 기독교연합신문이 만난 35년차 사모열전

6개월 딸 업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복음 전파해"
10년간 사택서 식사로 성도 섬김에도 감사 고백

“사모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은혜를 경험한 목회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이다. 그간의 목회 사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사모의 든든한 동역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열매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기독교연합신문은 창간 35(사모)주년을 맞아 1988년 교회를 개척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며 아름답게 목회사역을 내조한 사모(35)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기획했다. 평강교회(담임:이강재 목사)는 1988년 9월 3일 대전 서구 복수동에 터전을 잡은 교회로 본지의 역사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35년 전, 이강재 목사는 잘나가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영혼 구원의 일념 하나로 영적 불모지와도 같았던 대전 복수동에 평강교회를 개척했다. 8평 남짓한 창고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 그는 5년 후 40평의 돼지막사가 있는 부지를 매입해 예배를 드렸다. 성도들과 함께 악취로 가득한 막사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더 넓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에 감사를 고백했다.

2004년에는 지금의 교회 건물을 건축해 새 성전에 입당할 수 있었고, 지역도 발전을 이루면서 현재는 재적 성도 700여 명의 안정적인 교회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지난 26일 평강교회에서 만난 김경희 사모(61)는 지난 35년 평강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역사 속에서 사모로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눴다.

대전 평강교회 김경희 사모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던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며 지난 35년 평강교회의 역사 속에서 사모로서 경험한 감사의 제목을 전했다.
대전 평강교회 김경희 사모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던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며 지난 35년 평강교회의 역사 속에서 사모로서 경험한 감사의 제목을 전했다.

설레는 맘으로 드린 첫 설립예배

“천안에서 결혼을 하고 1년 후인 1988년 복수동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강재 목사님이 교회 개척의 열망을 안고 대전의 여러 지역을 돌아봤지만, 복수동에만 교회가 없었다고 했어요. 영적인 황무지라는 생각에 복수동을 선택했고, 저는 순종함으로 따라가게 됐습니다.”

결혼 전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평생 섬기는 사모의 길을 가겠다는 서원기도를 했던 그다. 그렇기에 고민도 하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목사를 따라나섰다. 8평 남짓의 창고교회에서 6개월의 젖먹이 아기를 안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첫 설립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에 큰 설렘과 기쁨을 느꼈노라고 고백했다.

“교회 개척 후에는 오로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불타서 눈만 뜨면, 아기를 업고 목사님과 함께 동네를 다니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녁에는 성도가 없다 보니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교회에 와서 주님을 만났을 때는 매우 뿌듯하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젊은 패기에 믿음 하나로 시작한 교회 개척이지만, 당시 복수동은 불과 가구 수 80여 호에 200여 명이 사는 대전의 변두리 동네였다. 게다가 대부분이 하우스촌일 정도로 가난한 동네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터.

“평강교회는 500년 동안 우상에 젖어 있던 복수동에 둥지를 튼 첫 번째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전도를 하다 보면 소금을 맞기도 하고, 너나 잘 믿으라며 핀잔을 주거나 욕을 하는 등의 별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에 일일이 신경 쓴다면 전도를 할 수 없었을 거예요.”

30년이 넘게 목회자 사모로 사역해왔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지금도 낯선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그다. 하지만 전도를 할 때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의연해지고 담대해졌다. 그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10년간 사택에서 식사봉사로 섬겨

가가호호 전도를 다니면서 문전박대를 당할 때도 있었지만, 한 영혼, 한 영혼이 전도되어 성전에 올 때면 큰 감동을 느꼈다. 비좁은 창고 교회에서 시작해 성도의 수가 늘어나자 돼지막사를 개조한 본당에서 예배를 드린 10년 동안 양무리와 같은 성도들을 먹이는 일은 온전히 김경희 사모의 몫이었다.

“개척교회이다 보니 일꾼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소수의 무리이지만, 점심을 먹일 성도들이 있다는 생각에 매우 기뻤고, 가족과 같은 느낌으로 성도들과 함께 밥을 먹었던 시간이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자그마치 500년 동안 무속신앙이 깊이 뿌리 박혀 있던 복수동에 교회가 들어서고 복음으로 다져지기까지 성장통이 없었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생활고를 겪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섬기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교회를 나오지 않는 교인들의 마음을 껴안는 일도 김경희 사모의 역할 중 하나였다. “목회자에게 거리감을 갖거나 대하기 어려워하는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 심방을 하면서 위로하며 섬겼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이나 감정을 살피고, 먼저 기도하며 다가갔더니 하나님은 제게 성도들의 모난 마음까지도 품을 수 있는 마음 밭을 갖게 하셨습니다.”

‘벼랑 끝’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한번은 쌀이 떨어져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불평하거나 사람을 통해 구하기보다 기도하기를 선택했던 그 날, 엘리야의 까마귀 사건과도 같이 누군가가 강단 앞에 쌀이 가득 들어있는 마대자루를 두고 간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 구하면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당시 12개월이었던 어린 자녀를 사택에 재워놓고 교회와 사택을 오가며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편 이강재 목사의 열정적인 전도와 목회 사역에 김경희 사모의 든든한 내조가 더해져 목회 현장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를 체험하면서 복수동 주민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교회에 오는 이들도 점점 늘어났다. 이강재 목사는 교회를 출석한 교인들의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일대일 제자훈련을 통해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했다.

이후 하나님은 김경희 사모에게 보석 같은 세 딸을 허락해주셨다. 돼지막사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은혜가 넘쳤고 80명이 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며 100명까지 부흥하자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부지를 매입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성도들이 파당을 지어 교회를 나가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딸이 뇌종양 판정을 받아 수술과 약물치료 중에 선택해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 도달했다.

“당시 18살이었던 큰딸이 뇌종양 판정을 받아 심적 고통이 매우 심했습니다. 수술을 하기도 어려운 부위라 약물치료를 선택했는데, 너무 힘들어해서 밤에 잠도 못 자고 딸을 돌봤습니다.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했지만, 놀랍게도 지난해 병원에서 완치판정을 받았어요. 저의 제일 큰 기도제목이 응답받은 것이죠.”

돌이켜보면, 고난은 터널이었고 믿음으로 걸어온 시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2004년 평강교회는 새 성전에 입당했고, 2010년 교육관 부지를 매입해 꾸준한 성장을 이뤘다. 어두웠던 복수동 일대도 재개발이 되며 발전되기 시작했고 젊은 가정도 많아지면서 새로운 도약을 이룰 수 있게 됐다.

이강재 목사, 김경희 사모 부부와 어린 세 자녀의 모습.
이강재 목사, 김경희 사모 부부와 어린 세 자녀의 모습.

영혼의 변화 목도…가장 큰 보람

김경희 사모에게 지난 35년간의 사모로서의 삶에 대한 정의를 부탁했다. 그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야 하는 사모로서의 삶이 어려웠지만, 가장 가치있고 보람된 삶이었다는 고백을 전했다. 그가 목회자 사모로서 가장 감사했던 것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던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충성된 일꾼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후 스스로 전도하는 모습을 보며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목회자 사모로서 마땅히 ‘사모는 이래야 한다’라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는 때론 큰 부담이 되어 따라오기도 한다. 그럴 땐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쳐도 비교하지 않고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인식을 통해 이겨냈다. 성도들의 관계와 여러 문제로 시험에 들고 낙심이 될 때는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심적 어려움을 돌파해갔다.

그는 “사모라서 겪는 고독감과 외로움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답답한 마음을 교인들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것이 사모가 가진 어려움”이라며, “그렇기에 마치 자녀를 위해 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무도 없는 성전에서 포효하며 울부짖는 기도로 극복해갔다”고 말했다.

이강재 목사에 대한 자랑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이 남다른 분”이라며, “지금도 청년의 마음을 잃지 않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최우선순위로 삼고 쉬지 않고 달려오고 있다. 무엇보다 목사님의 사역에 묵묵히 순종함으로 제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끝으로 그는 사모의 삶을 따라가는 후배 사모들을 위한 따뜻한 조언도 건넸다. “무엇보다 자존감을 잃게 되면 마음이 허탈해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사모의 길로 부르셨다는 자존감과 소명의식을 잊지 마십시오. 정말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 사역에 힘쓴다면, 이외의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대전 = 정하라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