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계신 아버지가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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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계신 아버지가 계셨다
  • 임문혁 장로
  • 승인 2022.05.0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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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혁 장로/서울 아현교회 원로장로·시인·전 진관고등학교 교장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동생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아버지가 그리웠고, 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시골 고향에서 중학교도 겨우 어찌어찌 힘들게 졸업하고 공부가 더 하고 싶은 나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상경을 했다. 먼 친척 아저씨가 경영하는 약국에 점원으로 들어가 약국에 딸린 좁은 골방에 기거하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고향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어머니와 동생들 생각에 눈물겨웠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힘들게 고등학교는 졸업을 했지만 대학은 더 이상 꿈 꿀 수 없었다. 공사장 인부, 막노동, 외판원, 공장 직공 등을 전전하다가 소집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해야만 했다. 3년을 군복무에 보내고 제대하여 사회에 돌아왔으나 사정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줄판에 글씨를 써서 등사로 찍어내는 인쇄방법이 많이 쓰이던 시대라서, 필경 일을 배워 필경사로 일하면서 학업의 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정규 대학 진학의 문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열리지 않았다. 다시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어려운 여건 때문에 교육 기회를 놓친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교육 제도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방송통신대학이었다. 이 새로운 제도인 방송통신대학이 나에게 구원의 빛이 되어 주었다.

방송통신대학 2년을 마치고(그때는 방송통신대학이 2년제 대학이었다.) 4년제 대학에 편입학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0년이 되는 해였다. 낮에 일을 해서 가족의 생활비를 벌고 내 학비도 마련해야 되기 때문에, 대학도 역시 고등학교 때처럼 야간 대학에 들어가야 했다. 삼십 대 중반이 되어 드디어 대학을 졸업하고, 중등교사 임용고사에 합격하여 중학교 국어 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쳤다. 기쁜 일이 겹쳤다. 교사가 된 다음 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내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산소엘 갔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이 대학 공부를 마치고 교사가 되고, 아버지가 이루지 못하신 문학의 꿈을 제가 대신 이루었습니다. 새삼 아버지가 그리웠다. 중학교에서 몇 년 근무하다가 명문 고등학교로 전근을 하게 되었다.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가시지 않았고, 공부에 계속 배가 고팠다. 그때 마침 한국교원대학교에 대학원이 개설되어 현직교사 파견 위탁 교육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 과정에 선발되어 석사학위 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또 한 번 내게 다가온 구원의 빛이었다. 석사과정을 마치자 이번에는 박사과정까지 개설되고, 나는 다시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영광을 얻었다.

중졸로 그치고 말았을 나의 학벌은 이제 박사로 바뀌었다. 나는 이제 대학 교수를 꿈꾸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수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아버지가 그리웠다. 이럴 때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었지 않을까?

그런데 대학교수는 안 되고, 생각지도 않았던 장학사가 되는 길이 열리고, 장학사를 거쳐 중고등학교의 교감 교장이 되는 일이 내 앞에 펼쳐졌다. 고등학교도 못 갈 형편이어서 야간 고등학교를 다닌 내가 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시인이 되고, 박사가 되고, 교회에선 장로가 되었다. 다시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안 계셔도 저 이만큼 왔습니다. 어머니 건강하시고, 동생들 다 잘 자라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습니다. 저 제법이죠?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아버지 없이 살면서 나는 늘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것이고, 거기에 운도 따라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결코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이 아니었다. 내 곁에는 항상 언제나 아버지가 계셨다. 더 크신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계셨던 것이다. 

세상 어떤 아버지보다 능력 있고, 멋있고, 누구보다 날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계셨던 것이다. 묵묵히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때론 손잡고, 때론 안고 업고, 어떤 때는 무등을 태우고 여기까지 오신 것이다.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일을 이루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하나님 아버지가 안 보이게 살아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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