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 - 입다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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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 열며 - 입다의 딸
  • 승인 2004.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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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신부/샬롬의 집 대표

오랫동안 ‘한 주간’을 열었다. 과연 나의 짧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한 주간을 여는데 과연 쓸모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오히려 나는 글을 쓰는 내내 괴로웠다. 부담이었다. 이제 다시 평범한 독자로 돌아가 말로 풀어 고갈된 삶의 우물을 더 채워나가야겠다. 독자들에게 송구스러울 뿐이고 감사할 따름이다.

구약 사사기 11장에 보면 입다의 딸 이야기가 나온다. 비적떼의 우두머리였던 입다는 자신을 창녀의 자식이라고 무시하던 길르앗 사람들이 암몬족을 쳐주면, 길르앗 사람들의 수령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자신과는 관계도 없었던 암몬족과 싸우게 된다.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께 서원하는데 그 내용이란 “돌아갈 때 누구든지 자기를 제일 처음 마중 나오는 것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삿 11:31)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그를 환영한 것은 그의 외동딸이었다. 입다는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바꿀 수 없다며 결국 딸을 죽인다.

여기에 구약성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인다. 입다의 딸은 이대로 죽기는 억울하다며 두 달 동안 실컷 울기나 하겠다면서 친구들과 이산 저산에서 울고,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 여자들은 해마다 억울하게 죽은 입다의 딸을 기리며 집을 떠나 곡을 한다는 것이다.

사사 입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자신의 딸마저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스러운 입다의 믿음일까? 이전까지 입다의 이야기는 무심코 그렇게 해석돼왔다. 그러나 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보다 더 억울한 죽음은 없을 것이다.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산양(羊)은 왜 입다의 딸 앞에는 나타나지 않은 걸까? 하나님마저 남과 여를 차별하는 것인가? 그러나 마지막 사족처럼 붙은 성서의 증언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것은 입다의 믿음이 아니라 억울한 한 여인의 죽음이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입다의 딸과 자매애 속에 하나가 되어 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은 우연히 일어난 죽음이 아니라 전쟁의 승리를 위한 광기와 남성 중심적 가부장주의 패권주의가 목숨을 앗아간 것이기에 아무 힘없이 억눌리고, 남성들의 성의 도구로, 집안의 소유물로 간주된 모든 여성들의 죽음인 것이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입다의 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역사의 반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신공양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저 수 천년 전에 팔레스틴의 광기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 최강국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보면서, 자신의 승리를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대통령과,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라크에 자신들 체제의 안녕을 위해 함께 침범하는 우리나라의 대통령, 그리고 김선일이라는 청년 때문이다. 김선일이라는 청년의 ‘살고 싶다’는 그 울부짖는 절규 앞에서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과 일부 언론은 ‘우방과의 약속은 깨뜨릴 수 없다’는 앵무새 같은 소리만 되풀이 한다. 무엇이 우방이고 무엇이 약속이란 말인가?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지킬 우방과 약속은 도대체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고 싶다.

입다의 서원을 받은 하나님은 과연 제물로 그의 딸을 받고 어떤 심경이었을까? 내 생각엔 하나님도 통곡하셨을 것이다. 그 때 입다의 딸은 친구들과 울기라도 했지만, 외로운 이방에서 처참하게 죽은 그에게는 친구조차 없었다. 이제 우리들이 그를 기억하며, 평화를 위해 곡을 할 차례다. 입다의 딸이여, 김선일이여. 그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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