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앞에 무력한 이방종교, 병자와 가족 버리고 도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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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 무력한 이방종교, 병자와 가족 버리고 도망쳐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1.03.02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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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 기독교와 사회문제 : 전염병(4)

이런 역병의 위기에서 이교 사회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지금은 질병의 문제는 과학이나 의학의 문제이지만 당시 사회적 인식은, 종교는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방종교는 확산되는 전염병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따라서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재난의 원인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생존의 위기 앞에서 공포에 사로 잡혀 있었다. 더욱이 예방이나 치병의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절망했다. 공포와 절망감이 죽음의 도시에 팽배하자 이교도들은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종교는 이 질병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고, 정신적 위안을 주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은 역병으로부터의 도피뿐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 의사였던 코스의 히포크라테스(c. 460~370 BC)는 치유할 수 없는 역병의 경우 도피가 최상의 선택이라며, 빨리(cito) 멀리(longe) 도망가되, 늦게 돌아오라(tarde)고 충고한 바 있다.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역병 하에서 의사가 줄 수 있는 최선의 대응 지침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도피가 최상의 안전이라고 여겨 부모는 어린 자식을 버려두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도피했고, 자식은 늙은 부모를 버려두고 도피했다. 이교의 제사장들도 동일했다. 심지어는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의 시의(侍醫)였던 갈레노스조차도 166년 역병이 덜한 고향 마을 시골로 도망갔다. 그러다가 168년 황제의 복귀 명령을 받고 아우렐리우스가 있던 아퀼레이아로 돌아갔다고 한다.

유기된 어린 아이들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굶어 죽었고, 늙은 노인들은 또한 굶주려 죽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 c. 200~ c. 265)는 이렇게 증언한다. “이교도들은 처음 질병이 발생하자 아픈 자를 내쫓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이 먼저 도망쳤고, 병든 자가 죽기도 전에 거리에 버려지고 매장하지 않는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치명적인 질병의 확산을 막고자 했으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망치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가족과 가축은 유기 되었다. 돌보지 않던 가축 또한 죽어 도시는 황폐화되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했다. 지진이나 기근, 재난이 일어나고 위기에 직면하면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이기주의와 불법, 사랑의 식어짐이다(마 24:12, 9~10). 실제로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자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했고, 사랑 배려 베풂 등 자선적 가치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마저도 의미를 상실했다.

로마 제국에는 자연 종교, 신비 종교, 그리고 민족 종교들이 있었으나 인간의 재난 앞에서 무능했다. 이들 이교(異敎, pagan)와 이교도들은 눈앞의 재난에 무력했다기보다는 그 종교 자체가 질병 앞에 무력한 의식적(儀式的) 종교에 불과했다. 다신교적인 사회에서 신들은 각기 다른 기능을 행사한다고 보아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겨도 내적 충돌을 느끼지 않았다. 신들은 종족이나 민족과 깊이 관련되어 있어 세계적 종교가 될 수 없었고, 항상 국지적 종교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절대적 종교가 있을 수 없고, 종교적 이행(移行)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는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재난 앞에 무력했다. 이런 종교는 교리나 윤리가 없었고 컬트 의식뿐이었다. 당시 종교가 재난의 현장에서 무기력하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자 사람들은 재난을 운명적으로 받아드렸고 이기적인 도피가 최선의 자기 보호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런 종교에서 윤리, 특히 생명 윤리라는 가치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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