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 - '하나와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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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 열며 - '하나와 공존'
  • 승인 2004.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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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핵집목사 / 열림교회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모든 것을 똑같이 하나로 만드는 것이 하나일까?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남성을 여성으로 만들어 하나가 된다거나 여성을 남성으로 만들어 하나로 되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 한쪽의 희생을 통해서만 하나가 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가 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가 되자는 목소리 뒤에는 힘 있는 쪽으로, 목소리가 큰 쪽으로, 잘 난 쪽으로 하나가 되자는 소리밖에는 들지 않는다

창조의 질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여성과 남성을 만드시고 ‘둘이 하나 되어’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남성이 여성을 보고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고 했다. 상대를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상대를 보는 눈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상대를 통해 나를 보지 못하는 데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역시 이라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상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모습이 상대의 눈동자에 비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상대를 제거함으로써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상대의 희생을 통해 곧 내가 죽는 것임을….

이런 하나의 모습은 결국 사람을 나누어 놓는 결과로 귀착되고 만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라는 이름아래 상대방을 희생시키는 역사를 살아왔다. 이제 허울 좋은 하나라는 이름아래 힘 없는 것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가 있고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도 마찬가지다. 평화와 하나됨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왔지만 언제나 남과 북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버리지 않았다.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며 자기 중심적인 하나됨을 이야기 해 왔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상대를 넘어뜨려 굴복을 시켜 하나가 되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나는 분명 공존이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르지만 서로의 사랑을 통해 공존하고, 그 사랑을 통해 생명을 잉태하듯 분명 하나는 공존이다. 2000년 6월15일 남과 북의 정상들이 만나 합의했던 것도 남북 공조와 우리의 엽합제,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합의했다. 이것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서로 공존하겠다는 약속이다. 상대가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고 내가 없이는 상대가 존재할 수 없다는 공존 의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하나를 이룰 수 있다.

상대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를 이루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희생과 고통과 아픔이 생길 뿐이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상대의 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주심으로 우리와 하나를 이루셨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미 동맹을 앞세워 국익이라는 이유를 가지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그 결과 더불어 살지 않는 곳에는 평화가 없다는 시험대 앞에 서 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담보하는 사회는 결코 생명도 평화도 꽃피워 낼 수 없다. 나를 주어 상대를 살리려는 사랑 안에서 진정한 하나를 이룰 수 있고 함께 공존하는 평화의 세상을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삶 어디에서나 이런 하나된 모습, 공존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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