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한국교회 탄압사 36년간의 일제 통치 아래 가장 통렬 한 형극의 길을 간 것이 한국교회였다. 일제는 한국통치에 가장 큰 저해요소 가 교회라 겨누고 한국교회를 고사시 킬 잔학하고 극한 압박을 가한다.
한국교회를 손잡아 주었던 <내편>이 있었던가 있었다. 105인사건 때, 그 변호인단 장을 맡았고, 2차 대전 종전 후에는 연 합국 일본전범재판소 변호인단장을 맡았던 에자와 히로아키다. 그는 105 인 사건을 맡았던 1912년, 평양 장로 회 창립총회에 와서 눈물로 인사를 한 다. 전국에서 대표적 기독교인 700 명을 잡아다가 처단해서 한국교회를 말살하려던 일제경찰인데, 에지와는 105인만을 유죄판결 받게 한다. 1915년 한국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한국교회의 명맥을 끊으려고 ‘개정 사 립학교령’을 내려 기독교 교육의 숨통 을 끊으려한다. 헌데 바로 1917년에 연 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기독교연합재단으로 설 립 인가를 받는다. 이것 은 엄청난 수수깨끼다. 거기에는 총독부 내무 국 장관 우사미 가츠오 란 기독교인의 손길이 있었다. 일본의 동경도 지사로까지 영전되었던 인물인데, 교묘한 방법 으로 기독교재단 설립을 인가하게 한다. 한데 1912.6.15일자 ‘재판 어드바타이저’란 일본 안의 언론에 데라 우치를 ‘속 좁고, 비겁, 오만, 우둔, 무학’이란 글이 실린다. 당 시 이런 기사는 대담한 것으로 아무리 영문판 발행이라 할지라도 일본 안에 서의 보도란 점에서 놀라울 뿐이다.
3.1독립운동 때 한국 편에 선 거대 인사들 3.1독립운동이 한참일 때 3.1독립 운동을 옹호하고 일본 군경의 진압방 법을 여지없이 맹타한 거물 일본인들 이 있었다. 도쿠도미 소호란 인물인데 당시는 총독부 기관지 ‘서울 프레스’의
총감독이란 명예직에 있었지만, ‘일본 국민사’ 100권을 저술하고 일왕과도 가깝고 일본군벌 수장 야마가다 아리 도모와도 절친한 국수파 황도주의자 였다. 다른 한 사람은 총독부 종교과장 학 무과장을 역임하고 후에 북해도청 장 관, 요코하마 시장을 여러 차례 역임한 일본 고등 관료 나카라이 기요시다. 그 는 3.1독립운동과 한국교회를 폄하하 고 탄압하는 일본 ‘모노-새끼들’이 있 다는 말로 총독정치를 비판 성토하고
있었다.
<성서조선> 폐간 안 된다 일본 육군 대좌 야마 다는 1939년 12월 김교 신에게 글을 보내 ‘성서 조선’이 폐간되어서는 안 된다고 흥분한다. 무 슨 일이 있어도 계속 그 사명을 다하라고 격려 한다. 일본 육군 군벌의 거물이 한 말이다. 패전 후 동경대 총장을 맡는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신사참배로 시달리는 한국교회를 위 로하려 내한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 혈통” 고백 2001년 12월 당시 일왕 아키히도는 68회 생일에 깜작 놀랄만한 말을 한 다. 곧 자기는 한국인 혈통이란 것. 백 제 무령왕의 딸 다카노 니이가사의 아 들이 간무천황이기 때문이다. 저쪽에 우리와 손잡는 벗이 있다. 여 기에 바로 세계역사와 그 미래 천국의 약속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