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해를 통한 나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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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를 통한 나라 사랑
  • 승인 2004.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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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하목사 / 아현교회

몇 년 전 사이판을 여행하면서 그 곳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의 경제력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세계 곳곳에서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패배를 당했던 부끄러운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집중 공략해 현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와이는 거의가 일본 소유가 되다시피 됐고, 사이판 또한 마찬가지였다. 총 칼의 무력 앞에서는 패배했지만 경제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야망에 불타있는 일본 사람들의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들도 세계 어디에 살든지 조국 땅을 밟게 되면 반드시 찾아가는 곳이 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을 찾아가서 기도하는 일이요, 둘째는 1백 미터 높이의 산지에 있는 맛사다 성이요, 셋째는 야드바심이라고 불리는 민족기념관이다. 나치 치하에서 6백만 명의 동족이 학살당한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한 유물관이다. 학살 사건을 용서하지만 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한 인간의 삶에서 조국이라는 존재는 아주 소중하다. 민족이나 국가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국민의 도리요 국가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성도의 바른 자세다.

나라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단테는 “태평 세월에 있어서의 애국심은 다만 사람이 정원을 쓸고, 집안일에 힘쓰며 세상일을 배워 한 나라의 번영을 기하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전쟁에서 싸우며 희생하는 것만이 아니요, 바르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모습이다. 우찌무라 간조도 “기독교에는 조국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평화는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평화는 무엇보다도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있어야 한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식민지를 삼아 지배하며 자원과 노동력을 빼앗아가는 국제 관계 속에서는 전쟁과 폭동, 테러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며 고귀한 생명이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가장 중요하며 평화가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남북의 대결뿐만 아니라 동서의 대결, 계층의 대결, 노사의 대결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진정한 평화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평화가 없는 공동체는 발전도 없고 희망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를 찾으라. 평화를 위해서 일하라”고 하셨다. 평화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다. 무엇보다 먼저 용서의 실천자가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무제한의 용서를 가르치셨고 용서하는 삶을 사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덕적인 부채가 있다. 이 부채는 우리의 방법이나 노력을 통해서 상환될 수 없다. 그러면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 큰 용서를 받고서도 작은 용서를 베풀지 못한다면 배은망덕한 인간이 된다. 용서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용서를 해 본 사람만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해 본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분단의 상처를 넘어서서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창을 녹여 낫을 만들고 다시는 서로를 치고 싸우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평화의 땅, 평화의 민족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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