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로 구원의 열정 전수한 두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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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구원의 열정 전수한 두 선교사 이야기
  • 이효상 원장
  • 승인 2020.10.1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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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권 특히 중국을 선교지로 중국과 조선에 복음을 전한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두 선교사가 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다.


마테오 리치 선교사는 중국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동양사회에 대한 기독교 전파가 목적이었으므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경우 불교와 도교 이념도 동원하였고, 중국의 고사(古事)와 성어(成語)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그렇게 하므로 기독교는 ‘서교(西敎)’,’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를 반대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그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중국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학, 즉 기독교(천주교)를 수용 신앙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1866년 (고종 3년)부터 1871년 (고종 8년)까지 이어진 한국 최대의 신앙박해사건인 병인박해와, 특히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자국의 문화를 자국의 국민들이 있는 대로 부수고 불태워 없앤 전례 없는 대사건으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기독교 신앙서적은 두 사건을 통해 전부 소실되었다.


그런가 하면, 마테오 리치의 기초를 닦은 뒤 이어 중국에 들어 온 존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연합장로교 선교사로,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개시했고, 1871년부터는 산동 반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존 로스 선교사는 1872년 중국선교사로 파송됐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역을 하여 심양의 동관교회를 설립하였는데 1873년 존 로스는 윌리암슨 선교사로부터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소식을 듣게 된다. 두 선배의 한국선교 열의에 감동받은 로스는 중국에서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존 로스 선교사가 한글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1877년 중국 선교지에서 저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한글 교재를 출판하면서 가로쓰기를 하게 되었고, 띄어쓰기도 함께 도입한 것이다. 그 책에서 “한글 자모는 아름다운 음성문자로 너무나 간단해서 모든 남녀노소가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글자이므로 한글로 인쇄된 어떤 책이든 자모만 배우면 읽을 수 있습니다”며 한글을 극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이후 1896년 서재필, 주시경,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 한글 최초 띄어쓰기로 전해져 오늘까지 그렇게 쓰여 진다.


그는 최초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매달린다. 선교를 위해 마테오리치 선교사가 기독교 교리를 한자로 출간하여 기독교 기초를 놓았다면, 존 로스 선교사는 라틴어나 독일어 성경을 평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글의 발전 및 복음의 확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두 선교사들을 생각함은 한자와 한글이라는 도구, 지식인과 평민이라는 대상 등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동 시대를 살며 같은 땅, 같은 선교지에서 한 사람은 중국을 또 한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 했던 그 영혼구원을 향한 열정과 사랑의 수고는 오늘까지 꺼지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근대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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