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베르트와 형제들?
츠빙글리는 1524년 12월 16일 스트라스부르에 거주하는 프란츠 람베르트(Franz Lambert, 약 1486~1530)와 믿음의 형제들에게 상당히 긴 편지를 썼다.1) 람베르트는 1522년 취리히에서 프란치스코 순회설교자로서 설교한 후, 츠빙글리와 성인 숭배 사상에 대해 논쟁하기도 했다. 츠빙글리에게 영향을 받고, 비텐베르크에서 잠시 공부한 그는 1년 후 결국 수도회를 탈퇴한 후, 1524부터 1525년 사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일했다. 스트라스부르의 개혁교회적 시장 슈투엄(Jakob Sturm, 1489~1553)의 추천으로 1526년부터 독일 헤센의 필립 공의 인정을 받아 종교개혁자로, 1527년 새로 새워진 독일 Marburg 대학 신학과의 교수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종교개혁은 스트라스부르에서 1523년, 24년 개혁신학적 설교자들이 임명되면서 설교와 예배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람베르트와 동료들의 물음이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해 츠빙글리에게 도착했는데, 츠빙글리의 편지는 이를 향한 답장이다. 당시 전환의 시대 스트라스부르 정부가 종교개혁에 아직 미온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향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신앙설교와 율법 설교에 대한 츠빙글리의 언급이 흥미롭게 제시되는데, 믿는 자에게 율법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하는 것으로, 루터의 입장과 비교할 수 있다.
1524년 11월 중순, 독일 출신으로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쳐(M. Butzer, 1491~1551)가 제기한 세례에 관한 질문에 츠빙글리가 답을 하였다. 비텐베르크 초기 종교개혁자요,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총장이었지만, 나중 루터와 길을 달리했던 안드레아스 칼쉬타트(Andreas Karlstadt, 1486~1541)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재세례파 지도자 발타자르 후브마이어(Balthasar Hubmaier, 1480?~1528) 사이에 과격한 재세례파 입장을 두고 취리히에서 이루어진 ‘화요일 담화’에 대한 언급이기도 했다. 4명의 취리히 시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재세례파 지도자와 취리히 교회의 담임목사 사이에 일치를 위한 비공개 대화였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불신 정부
츠빙글리는 ‘첫 편지’의 물음인 불신 정부에게 하나님 율법의 일을 행하도록 권하고, 그래서 그들의 잘못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불신 정부란 종교개혁 편에 서지 않은 채, 중세 로마교회 입장에 머문 교회라고 생각한다. 츠빙글리의 답은 정부가 바로 믿지 않는다면, 경고해야 하는데 전혀 율법의 음성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운 정부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츠빙글리는 먼저 율법의 기초가 되는 신앙을 줄기차게 설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츠빙글리는 ‘율법의 근본이 믿음’이라는 말이 하나의 이례적 발언(eine ungewoehliche Rede)이라고 하면서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될 진리라고 확신한다.
1) Ernst Saxer(edt.), Huldrych Zwingli Ausgewae
hlte Schriften, 108-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