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예배드렸을까?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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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예배드렸을까? ④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0.10.0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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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정기적 예배, 이교도 종교의식과 완전한 차이 보여

앞에서 2세기 중엽 유스티누스가 기록한 『제일변증서』(Apologie) 중 예배와 관련된 증언을 소개했는데, 이런 증언을 정리하면, 당시 예배는 성경 낭독, 설교, 공동기도, 봉헌, 감사기도(Consecrare)로 진행되고, 그 후에 성찬을 함께 나누고, 공동식사를 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유스티누스의 이 글이 중요하게 간주되는 이유는, 기독교 예배의 기본 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예배 순서가 2세기 당시 기독교회 예배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모든 교회가 이 순서를 따랐다고 볼 수도 없다. ‘유스티누스 쉐마’로 불리는 ‘말씀 봉독-설교-중보기도-봉헌-감사기도(축성)-성찬-애찬’ 순서는 하나의 예배 모델일 뿐이고, 다른 모든 교회가 이 순서대로 통일될 이유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형식의 예배가 드려졌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기독교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시작된 기원 64년 이후 예배는 오직 믿는 자들만이 모였다는 사실이다. 불신자들이나 이방인들은 집회에서 제외되었다. 플리니가 트라이얀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은밀하게 모이는 집단이었고 신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처벌을 받아야했음으로 외부인들이 예배에 참석할 이유도 없었고, 그들에게 은밀한 집회를 공개할 이유도 없었다. 이런 점 또한 초기기독교 문헌에 드러나 있다. 

변증가로 불리는 아테네의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가 말한 바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정보 제공자’(lying informers)들이 신자들의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외에도 이 점을 지지해 주는 여러 흔적이 있다. 로마제국에 산재한 교회에서는 예배 참석에 합당한 사람만이 들어오도록 문지기를 배치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볼 때 초기 기독교에서 예배와 전도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할 점은 기독교회의 정기적인 예배는 당시 사회의 종교적 관행에서 볼 때 독특한 실행이었다는 점이다. 예배는 기독교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정기적인 집회였다. 그러나 이교에서의 예배는 정기적인 종교행사가 아니었다. 이교도들은 필요가 생겼을 때 신들을 찾아가거나 월중이나 연중 특정한 날에 해당 신들을 예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독교 공동체가 드리는 정기적인 예배의 전례는 오직 유대교뿐이었다. 물론 기독교가 유대교적 뿌리에서 배태되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다른 종교와는 커다란 차이점이었다. 기독교회의 정기적인 공중예배는 로마시대의 수많은 이교도들의 종교의식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종교의식이었다. 후에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다른 모든 종교는 신상(神像)이 있고 신전(神殿)이 있었으나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런 조각이나 건물이 없었다. 

신상이 없었던 것은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 20:4, 신 5:8)는 제2계명에 대한 순종인 동시에, 초월적 존재를 어떤 형상으로도 적절하게 나타낼 수 없고, 유한한 인간이 인지하고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종교적 신념의 반영이었다. 이런 신념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본문이 디모데전서 6장 15~16절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여타의 종교와 달랐고, 신상이나 신전은 없었으나 책을 가진 종교였다. 그 책이 바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텍스트 공동체’(text community), 혹은 ‘책의 종교’(Religion of Book)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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