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편지들(1) - 미코니우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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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편지들(1) - 미코니우스에게 -
  • 주도홍 교수
  • 승인 2020.07.0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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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의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98

편지의 역사성
역사 연구에서 편지는 사실(史實) 확인을 위한 역사 자료, 곧 사료(史料)로 평가를 받는다. 서로 주고받은 공적, 사적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이뤄진 구체적 상황을 인식하며,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다. 성경 가운데 로마서를 위시한 서신들이 있는데,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구체적 정황을 두고 이뤄진 내용으로, 무엇보다 사실 확인이 요구되는 역사 연구를 위해서 소중한 자료이다. 

공적 문서나 글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개인의 생각과 의지를 사적 편지에서 만날 때, 신선감과 인간 이해, 숨겨두었던 속마음을 만나는 듯하여 역사적 인물과 친근감과 특별한 교감을 갖게 한다. 같은 맥락에서 16세기 츠빙글리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읽는 일도 뜻깊다. 츠빙글리가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를 다 소개할 수는 없겠지만, 선택적으로 그의 편지들을 소개하려 한다.    
        
미코니우스?
1520년 7월 4일 어떻게 세상이 전개될 줄 아무도 모르는 혼란의 시대 츠빙글리는 스위스 루처른(Lutzern)에 사는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 1488~1552)에게 편지를 썼다.1) 

흑사병으로 인한 죽음의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츠빙글리는 거의 같은 시기 감사 찬송을 썼는데, 찬송에서 나타났던 종교개혁을 향한 그의 소명 의식은 이 편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직 복음에 서서 그리스도를 따라 어떠한 고난도 각오하고 교회를 새롭게 할 각오를 츠빙글리는 보여주고 있다. 

루처른 출신 미코니우스는 1510년 바젤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고, 1516년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가 세운 학교 책임자가 되어 일하는 중, 1519년 츠빙글리를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로 오게 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 1519년 미코니우스는 루처른에 학교를 세우고 교사로서 일하게 되었는데, 1522년 신앙 문제로 그 학교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아인지델른으로 옮겨 스위스 종교개혁자이며 츠빙글리의 동역자 레오 유드(Leo Jud, 1482~1542)의 후임으로 일하다, 1524년 취리히 프라우뮌스터교회가 세운 학교 책임자로 부임했고, 미코니우스는 츠빙글리의 가장 신실한 친구가 되었다.

츠빙글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첫 번째 자서전을 쓴 인물이 바로 미코니우스였다. ‘가장 사랑하는 미코니우스’로 서두를 연 편지는 답답하고 어두운 시대를 향한 츠빙글리의 묘사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서구에서는 가까운 사이 성보다는 이름을 부르는데, 편지에서 그의 성 미코니우스로 호칭하는 것을 볼 때, 둘 사이가 그렇게까지 허물없이 지낼 정도로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지 않나 생각한다.


1) ‌Ernst Saxer(edt.), Huldrych Zwingli Ausgewaehlte Schriften, (Neukirchen-Vluyn, 1988), 17-21: “An Oswald Myconius in Luzern(4. Juli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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