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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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연대
  • 승인 2004.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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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7일에는 내가 속한 성공회 서울교구 서품식이 있었다. 사제 9명과 부제 5명이 탄생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감회는 늘 새롭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저 바닥에 엎드리게 했는가(성공회 서품 대상자들은 복종과 순명의 의미로 바닥에 엎드린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비춰 본다. 과연 그 때의 각오와 감격을 지금 얼마나 지키며 살고 있는가? 이 시대의 저 중세적 냄새가 펄펄나는 성직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성직자란 역설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말도 안되는’ 두 가지의 상충되는 언어를 ‘역설’이라 한다. 성직자는 이 역설의 가운데서 마치 양쪽의 힘센 말들이 사지를 잡아 당기는 극한 형벌에 처한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성직자는 그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 성직자는 사람들과 온전히 함께 있어야 하면서도, 그들과 같으면 안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설의 형벌이다. 이를 견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아야 이길 수 있는 형벌이다. 자기 비움(無)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이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겪으셨다.

“그리스도 예수는 … 굳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빌 2:6~7).

신과 인간이라는 역설을 하나로 화해시킨 예수를 히브리서에서는 ‘대사제’라 칭하는데, 그의 대사제됨은 처참한 그의 고통과 죽음으로 인한 것이었다. 구약의 사제가 희생 번제물을 바치는 이였다면, 대사제는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쳤기에 가능했다(히 7:27). 이는 어쩌면 우리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누군가 그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겠다고 맘먹는 그 때, 스스로 교만과 영웅주의의 덫에 걸려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조차도 우리의 뜻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처세술로서의 겸손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humble)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성직자로 선택됐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양이나 권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으신 분이 아니시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는 재현자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이며, 시대의 표징으로서 세상과 성스러움의 경계를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를 성직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숱하게 들었지만, 세상의 변화에 비해 교회의 변화의 속도는 턱없이 느리다. 성직자는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서 그 담을 허물어야 한다. 허물면서 재건해야 한다. 교회는 교회대로, 세상은 세상대로 재건하면서 경계를 허무는 역설의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직은 변해야 하며 나 자신이 없어지더라도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변하지 않는 성직자의 역할이다.

성직의 길은 아픈 길이다. 가시밭길이다. 맘이 아프고, 현실에 치여 지칠 때가 많지만, 그때마다 숨은 기쁨이 있기에 이 길을 갈 수 있으리라. 그것은 우리의 아픔은 아픔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역설의 현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낳고, 새로운 생명을 창출하는 산고(産苦)이기 때문이며, 그 순간 우리는 그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처한 역설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대로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소통과 연대하지 않는 성직을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정호 신부 / 샬롬의 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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