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지혜의 보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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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지혜의 보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다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0.04.01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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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잠언이야기 ⑧ - 지혜는 분명한 행동으로 표현됩니다(잠 3:27~31)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고, 지혜는 그것을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입니다(잠 3:18). 표현이 파격적입니다. 생명나무가 무엇입니까?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먹고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화염검을 두어 지키게 하셨던(창 3:22~24) 그 나무,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를 통해서만 다시 다가갈 수 있는 그 나무입니다. 핍박을 견디고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이며(계 2:7), 타락한 피조세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새 예루살렘이 세워졌을 때 생명수의 강둑에서 만국을 치유하는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생명나무입니다(계 22:2).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권합니다. 이 지혜를 굳게 잡고 떠나보내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말대로 따른 독자라면 다시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이제 그 지혜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실천되지 않는 지혜는 이론이요 이상일 뿐입니다. 

잠언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명확한 지침들을 제시합니다. 27~31절을 보십시오.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들이 나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인색하게 굴면서 줄 수 있는데도 공연히 돌려보내 애태우는 행동, 탈 없이 지내던 이웃을 애꿎게 해치는 짓, 딱히 피해를 주지도 않은 사람과 다투는 행동들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고 모방하는 행동이 이 금지사항 목록에 덧붙여진 것이 인상적입니다(31절). 난폭한 방식으로 힘과 부를 쌓은 사람들을 보며 그들처럼 되려는 마음이 인다면 그 끝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32상). 여기 미워함으로 번역된 단어는 강한 혐오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혐오 대상이 된다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 있을까요. 
이들과 정반대 지점에 정직한 자가 존재하는데, 그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있다”(3:33). 교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소드’는 속마음을 나누는 친밀한 사귐으로,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예언자를 참석시키시고(렘 23:18, 22) 당신의 뜻을 열어 보이시는(암 3:7) 그런 관계를 말합니다. 

영적인 지혜의 보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지혜의 여인이 제시하는 장수와 부귀는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메인코스로 이끄는 애피타이저라 하겠습니다. 좋은 것이지만 궁극의 가치는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물질과 명예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편이라면 감사히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면 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호의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연약할 때면 이웃의 도움을 받고, 튼튼할 때면 이웃을 도우면 됩니다. 받을 때나 줄 때나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면서 타인을 냉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형제의 부르짖음을 외면한다면(27~28절), 우리가 재앙을 만나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응답지 않으실 것입니다(2:28).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에게 야고보서가 도전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이 말씀대로 따르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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