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 환자의 동네병원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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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 환자의 동네병원 사용설명서
  • 송태호 원장
  • 승인 2019.10.29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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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사 송태호의 건강한 삶 ⑯행복한 신앙

수 년 전 우리 의원에 다니던 환자가 불치병 판정을 받았다. 환자는 평소 가벼운 감기나 배탈 등의 질환으로만 방문 하였었는데 수 년 전 암이 생겨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치료 중이다. 환자는 암 치료 후 한때는 완치 판정을 받기도 하였으나 다시 재발하여 힘든 항암요법을 받던 중 부쩍 의지가 약해져 병원 방문 회수가 늘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신경질적이었고 항상 진찰소견보다 심한 증상을 호소하였다. 

몸살로 내원한 환자는 진료실에서 ‘이젠 그만 하고 싶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다짜고짜 눈물부터 쏟아냈다.  혈관이 나오지 않아 여기저기 찔러댄 주사자국을 보이며 더 이상 주사 놓을 곳이 없다며 울었고, 입맛이 떨어졌지만 억지로 식사를 하다가 토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울었고, 저녁에 누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앞이 깜깜하다며 잠이 안 온다고 울었다. 동네의사인 나로서는 참 난감했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며 환자는 고마워 했다.

겉에 보이는 혈관이 아니라 몸 깊은 곳에 있는 혈관을 통하면 항암요법을 계속할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잠을 잘자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으로도 암과 싸워 이길 기운이 날 것이라는 내 말에 수면제와 항우울제 등을 처방 받고 원장실 문을 나서던 환자의 뒷모습은 나로 하여금 ‘최선의 진료란 무엇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하였다. 다행이 수 일 후 다시 내원한 환자는 원장님 덕분에 많이 편해졌다고 하며 다시 항암요법을 받으러 간다고 하였다. 

돌이켜 보면 나의 내과의사 시작은 패기와 치기가 공존한 시기였다. 어떤 환자던지 꼭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의사의 지시를 지키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불성실하고 오만한 태도로 대한 적도 있다. 어려운 진단을 위하여 환자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검사를 한 적도 있으며 그를 통하여 진단을 해냈을 때에도 그 병 때문에 당할 환자의 고생과 보호자들의 입장에 대한 걱정보다는 진단을 해냈다는 성취감을 더 크게 느끼기도 했다. 의사에게 호소하는 환자의 주관적 증상보다는 객관적인 검사결과를 신봉하며 환자의 고통을 간과하여 무작정 참으라 한 적도 있다. 대신 열심히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주어진 검사결과를 통해 교과서에 입각한 치료를 하는 것이 당시에는 최선의 방법이고 진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네의사로서 해가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점점 ‘어떤 것이 최선의 진료인가?’ 하는 생각은 머리 속을 떠나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환자를 가능한 한 편한 상태에서 치료해 주는 것이 최선의 진료라고 생각한다. 환자가 아프다면 아픈 것이며 환자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진료를 위한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큰 병원에서 불치병 치료를 담당하는 수 많은 의사들은 대개 환자들의 주된 병에만 신경을 쓴다. 자질구레하지만 환자가 불편하다고 한 증상들을 무시하거나 자기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의사에게 미루기도 한다.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한 지식은 점점 깊어지고 치료 노하우도 쌓이겠지만 환자를 인격체가 아닌 장기의 조립품으로 보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대기 환자에 치인 환자들도 지레 겁을 먹고 자기의 주치의에게 자기의 요구를 강력하게 말하지 않거나 의사가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자세한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의사도 결함 많은 사람일 뿐이다. 환자의 반응은 의사의 관심을 유도한다. 환자들은 병뿐 아니라 환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의사를 원한다. 이것이 내가 동네의사 생활을 하며 내린 결론이다. 

대학병원에서 힘든 치료를 받느라 생긴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은 환자의 동네 주치의인 동네의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동네의사가 환자의 불치병을 고칠 순 없겠지만 환자들도 동네병원에서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고, 동네의사를 통해 치료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용기를 얻어가며, 어떨 때 빨리 큰 병원에 다시 가야 하는지 등 병과 싸우는 불치병 환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겠다.

송내과 원장·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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