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와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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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와 사회적 책임
  • 박용규 교수 (총신대신학대학원 역사신학)
  • 승인 2019.10.2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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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부흥과 기독교 민족운동

1903년부터 1907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각성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각성을 태동시켰다. 성령으로 거듭난 심령들 가운데 배움에 대한 열망이 점증했고 새로운 세계관이 이식되었다. 그 결과 대부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일소하고 1부1처제의 정상적인 결혼관계를 정립시켜주었으며,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일깨워 근면성실한 삶을 살도록 도전을 주었다. 

대부흥운동은 민족복음화 열정을 불어넣어 이 민족이 진정으로 살길은 민족 전체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이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백만인구령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은 전형적인 민족복음화 운동이었다. 대부흥운동은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기왕의 기독교민족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하도록 만들었다. 평양노회각지경사기에 기록된 대로 대부흥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이웃을 위한 나눔의 실천이 교인들 가운데 활발하게 일어났다. 

교회와 개인이 모두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사회적 민족적 책임을 실천하는 일에 좋은 모범을 보였다. 이 같은 사회개혁과 민족의식은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중심기관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탁월한 선교사들과 민족애와 신앙심으로 무장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기독교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신민회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다양한 사회계몽운동을 펼쳤다. 기독교 학교가 일제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1911년 105인 사건과 1919년 삼일운동은 기독교민족운동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1910년대의 기독교민족운동과 1920년대의 사회계몽운동은 모종의 관계를 지니며 전개되었다. 종교를 초월하여 장로교, 감리교, 불교, 천도교가 연합하여 삼일운동을 전개할 때 33명의 서명자 가운데 장로교인은 7명이었다. 이들 7명 가운데 5명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거나 재학했던 이들이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사회적 책임을 깊이 있게 의식하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결과였다. 평양지역은 물론이고 전국의 장로교회는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삼일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이들, 105인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1920년대 사회계몽운동을 주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조만식과 강규찬이다. 평양산정현교회 담임이었던 강규찬과 그 교회 장로(출옥당시는 집사)였던 조만식이 중심이 되어 물산장려운동, 주일학교운동, 청소년운동, YMCA YWCA 운동을 주도할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장로교가 있었다. 1920년대 사회계몽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놀라운 결실을 맺었다.

신사를 강요한 일제에 맞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한 것도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은 그 출발 동기 자체가 신앙운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배도를 강요한 일제는 반드시 패망해야 할 적그리스도였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이 단순히 신앙의 영역을 넘어 민족운동으로 기억돼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본이 패망하게 해달라고 한국교회는 기도하였다. 한국 민족을 대표하는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본국가에 신앙적으로 맞선 것이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신학대학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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