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사관생도인 선배가 있었다. 겨울방학이 되어 집에 왔는데, 차가운 바람이 부는 신작로 위에서 그를 봤다. 공사 외출정복에 어깨에는 망토를 둘렀고 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 속 깃이 펄럭였다. 가슴 설레이도록 무척 멋있었다. 커서 과수원을 해보겠다던 나의 꿈은 순식간에 변했다. 실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무척 섭섭했으나 군에서 유격훈련을 받고서야 위로를 받았다. 눈물 콧물을 쏟아내면서, “아들은 절대로 낳지 말자” 다짐을 할 그때 직업군인이 안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육군사관학교 일학년생도의 별명이 ‘두더지(Mole)’다. 그저 무조건 참고 견디고 몸을 움츠리고 나서지 말아야 할 신입생(Freshman)들의 형편을 표현한 말이다. 이학년이 되면 ‘빈대(Bedbug)’로 바뀐다. 사사건건 그들에게 달라붙어 지시하고, 감독하고, 괴롭혀야 하는 위치다. 거의 엄한 아버지와 잔소리 심한 시어머니의 수준이다. 늘 야단을 치고 교정을 한다. 누구도 이들을 제어할 장치가 없는 듯 보이는데, 바로 이학년의 빈대 속성을 잡아내는 삼학년이 “살충제(Dichloro Diphenyl Trichloroethane” 역할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서로 지적해서 들춰내고 혼을 내고, 뒤돌아서서 또 기가 죽어 차라리 맥이 빠지고 희망이 없는 듯 보일 때 사학년이 있다. 그들의 별명은 ‘놀부(Nolbu, old brother, non worrier)’다. 뱃속 편하게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 주눅 들어 있는 신입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해준다. 눈물을 닦아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용기를 준다.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분위기 속에 놀부들은 교정을 돌며 그들을 부추겨준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책에서조차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이 있다. 원래 제목인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이다. 개인적인 결론이지만, 한 국가나 사회의 정의는 ‘법’이다. 죽을 만큼 힘이 들고 어려워도 지켜야하고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권력’앞에도 굽힘이 없어야 한다. 유일한 출구는 철저한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의(Justice)는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