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또다시 반복된 죽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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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세상]또다시 반복된 죽음에 관하여
  • 이민형 교수
  • 승인 2019.10.22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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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형 교수 / 성결대학교
이민형 교수 / 성결대학교
이민형 교수 / 성결대학교

한 사람이 죽었다. 아니 한 사람을 죽였다. 조사 하나, 그리고 모음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 의미가 무서울 정도로 다르다.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 한참 푸를 수 있는 나이에 그녀는 스스로 삶을 접었다. 정말 스스로였을까? 언론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두고 연일 악성 댓글에 대한 기사를 내고 있다. 맞다, 그녀의 우울증을 유발한 가장 큰 이유는 모니터 화면 너머에 가려진 잔인한 폭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모습과 행동이 단지 보통이라는, 도무지 정의내릴 수 없는 그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디지털 배설물을 뒤집어 써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은 능동형일 수도 있지만 수동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일까? 악성 댓글을 쓰지 않겠다고 반성하면 괜찮을까? 악성 댓글을 쓴 적은 없으니 그녀의 죽음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는 그 정도가 도덕적 책임을 다한 것일 터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조금 더 진지한 성찰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기독교의 가치와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악성 댓글이 이번 비극을 만들어낸 기표이라면, 그 기반에 자리 잡고 있는 기의는 다름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혐오의 재생산이다. 이 두 가지는 기독교 복음과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것들이다. 먼저 다름에 대한 불편함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직접적으로 반()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을 만드셨고, 지금도 그 안의 많은 것들을 손수 짓고 계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아름답게 다양하며, 다양해서 아름답다. 창조의 끝을 알 수 없는 것이야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눈앞에 펼쳐진 다양함의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부정하는 인간의 교만함과 이기심에 기인한 의지적인 죄이다.

이번 사건으로 고인이 된 그녀는 주관이 뚜렷하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선물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녀가 받아야 했던 비난의 화살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생각해보라.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른 태도를 보였을까? 달랐다면 왜 비난의 화살을 멈추라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우리가 머뭇거리던 사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생명이 우울함을 이기지 못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범한 죄, 혹은 그러한 죄를 방관한 잘못을 자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할 것은 혐오의 재생산 문제이다. 고인이 된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악성 댓글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악성 댓글뿐만이 아니다. 언론이 퍼뜨리던 자극적이고 과장된 기사들은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들의 소재가 되었고, 그러한 소문들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그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되돌아갔다. 반복적으로 들춰지는 한 사람의 과거. 잘잘못에 관계없이 보는 사람의 마음대로 재단된 소문들이 계속해서 당사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일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잊혀질 권리가 있다. 그녀는 그 권리를 박탈당했고, 결국 아무것도 그녀를 죽음의 손아귀에서 보호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잊혀짐에 근거한 구원을 믿는 종교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앞에 과거의 자신을 고백하고, 새 사람이 되는 회심의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시작점이다. 하나님은 뉘우친 죄를 다시 묻지 않으신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업신여기는 행위이다. 심지어 허물이 아닌 것에 대해서 같은 행동을 보였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죄이다.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눈빛이, 말투가, 행동이, 그리고 그녀에 대한 대화,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향한 이유 없는 혐오를 재생산했는지 말이다. 혹여라도 그러했다면, 우리는 그 무거운 십계명 중 하나를 어긴 엄청난 죄를 뉘우쳐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87세의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고 고백했다. 아주 철학적이지도 않았고, 아주 감상적이지도 않은 그의 대답이 오래 마음에 남아있는 이유는 아마도 87년이라는 오랜 삶을 정리하는 사람의 담담함 때문이었으리라. 자신의 모든 기억을 선물로 추억하며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의 모습을 보다보니 너무도 급하게 삶을 정리해야만 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과연, 그녀가 여든이 넘도록 이 땅에서 살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돌아보았을까? 의외로 평범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그렇게 되돌아볼 수도 있었을 그녀의 오랜 시간을 빼앗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녀의 다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알아봤다면, 설령 개인이 받아들이기엔 그 다름이 부담스러웠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더라면, 어딘가에서 들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어딘가로 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먼 미래의 언제쯤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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