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과 파벌 떠나 ‘화해와 통합’의 정신 발휘한 손정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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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과 파벌 떠나 ‘화해와 통합’의 정신 발휘한 손정도 목사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9.08.1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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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섬김’의 리더십으로 독립운동 이끈 민족지도자

올해는 3.1운동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백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당시 임시정부 수립의 첫 과정에서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臨時擬晶院)’의 부의장과 의정을 맡아 수행한 인물이 있다. ‘남들이 피하는 어려운 일들을 솔선수범해서 희생함으로 처리한다’는 걸레정신으로 노선과 파벌을 떠나 평생 나라의 독립운동에 앞장선 손정도 목사(1882~1931)가 바로 그다.
자신을 더럽히면서도 남을 깨끗하게 하는 걸레처럼, 더럽고 냄새 나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이 있다면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솔선수범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1920년대 기독교진영 안에서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간 이념적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화합과 통합’의 정신을 발휘했던 그의 삶은 반세기 넘게 분단의 현실을 살고 있는 오늘날 새롭게 조명해볼 시사점을 제공한다.

▲ 손정도 목사(1882~1931).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40대 중반의 모습

‘기독교 신앙’이 우선적인 신념체계

유교 가문의 집안에서 자라 20세까지 한학을 배우며 평범한 생활을 했던 그는 1904년 관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러 가는 길에 한 목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 진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그 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귀향한 그는 기독교로 개종을 결심하고 상투를 자르고, 사당(祠堂)을 부수며 내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 일로 집안에서 쫓겨난 손 목사는 목사의 소개를 받아 무어(J.Z. Moore, 문요한) 선교사를 통해 1904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자극을 받아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진학했으며, 평안남도 진남포 신흥리교회(현 비석리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게 된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 손 목사는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며, 설교 때마다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규탄했다. 그는 목회 이후 교회의 부흥을 이끌며, 목회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 감리회 조선매년회의 파송으로 1910년 만주 선교사로 파견된다.

만주 선교사로 파송 받은 손 목사가 언어공부를 위해 북경으로 들어간 것은 본격적인 선교사역의 시작과 동시에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큰 계기가 됐다. 그는 북경에 머물면서 조성환,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들과 접촉하게 됐으며, 실의에 빠진 한국 이주민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심어주며 독립운동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안동, 하얼빈, 간도,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1912년 일제의 날조된 음모인 일본 수상 ‘가츠라암살음모사건’으로 하얼빈 주변의 민족자 수 십명이 체포돼 구금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손 목사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된다. 그 뒤 1년 만에 무혐의로 석방되었지만, 다시 북간도 무관학교 설립기금 모금사건으로 체포돼 1년간 전남 진도로 유배되고 만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됐으며, 1년 후인 1915년 감리교회 모교회인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로 다시 파송돼 시무했다. 손 목사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정동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재임하며 유관순 열사 등에게 항일정신을 가르쳤다.

민족지도자 이전 뛰어난 ‘영적 지도자’

정동교회 부임 이후 영적 능력을 가진 열성적 설교와 전도로 교회를 수적으로 부흥시켰을 뿐 아니라 안정적인 목회를 통해 1917년 교인 수를 2,283명으로 올려놓아 전국에서 으뜸을 차지하는 교회로 발전시켰다. 또한 교회에서 이전의 남녀 교인석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했던 휘장을 없애고 의자를 놓아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함으로써 장안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간의 손정도 목사에 대한 연구에 대해 아쉬운 점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정치적 행위에 많은 초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회활동과 선교활동을 볼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그의 우선적인 신념체계이자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동기였다는 점이다.

이상규 교수(백석대)는 “손정도 목사의 목회와 민족운동은 동시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신앙이 그의 우선적인 신념체계이자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동기였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눈여겨 볼 점은 ‘가츠라암살음모사건’에 휘말려 진도로 유배된 상황에서도 손 목사가 신앙집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복음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교수는 “1924년 8월 6일과 13일자 ‘기독신보’에서 ‘만주선교의 요구’에 대한 글을 통해 손 목사는 순전한 복음전도자로 선교지와 선교사역을 위한 물질적 후원을 강조했다”며 “이 글에서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에 관한 암시나 언급이 전혀 없다. 도리어 만주의 조선인들의 영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교회의 책임을 환기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손정도 목사는 민족운동가 혹은 독립운동가이기에 앞서 건실한 목회자이자 신실한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동족의 영혼과 삶의 현장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마음을 가진 인물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

열성적인 목회로 교회의 부흥을 이룬 가운데 그는 1918년 교회에 1년 휴직원을 내고 고향 근처인 평양으로 이주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병치료’를 내세웠지만, 실제적인 사임의 원인은 은밀히 독립운동에 관여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평양에 체류하는 기간은 3.1운동을 앞둔 시기로 이승훈으로부터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사양하고 대신 신흥식, 길선주 목사를 소개해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했다.

1919년에는 3.1운동 직전 상해로 건너가 안창호,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임시정부 설립과 운영을 위해 힘썼다. 당시 상해에는 국내외 11개 지역의 독립운동가 대표들이 대거 거주했는데, 이들 모두가 투표에 참여하는 직접선거가 결코 용이하지 않았기에 임시의정원의 의원구성은 각 지역대표로 추대됐다. 이들 가운데 다수가 기독교 지도자로 4월 9일과 10일 양일에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회됐다.

이 회의에서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목사가 선출됐으며, 4월 11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이 국호가 임시정부의 명칭으로 정착됐다. 이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됐으며 이동녕이 돌연히 의장직에 사임함으로써 손정도 목사가 의장이 됐다. 그는 의장을 맡아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할을 감당하며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0년에는 김구, 김철, 김립, 윤현지, 김순애 등과 의용단을 조직했고,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내 불화와 파벌싸움에 지친 그는 1923년 1월 이후 임시정부와 절연하고 철수하게 된다.

▲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당시 손정도(두번째줄 왼쪽에서 8번째, 7번째는 이승만 전 대통령)




 

 



 

 

 

 

노선과 파벌 떠나 조화와 연대’ 모색

1920년대 중반 이후는 기독교 진영사이에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으로 갈려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같은 독립진영 안에서도 이념과 방법론의 차이로 갈등과 분쟁을 경험했던 것. 특히 중국과 만주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점차 그 영향력을 확산시켰고 민족운동가 중에도 사회주의로 전향하거나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해 투쟁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상해 임시정부조직에 함께 참여했던 이동휘와 여운형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었다. 그 결과 임시정부 내부적 충돌 배경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간 이념적 갈등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상황에서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 민족주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해 ‘열린 자세’로 대화와 협력을 추구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이 시기 손 목사는 어느 한편을 지지하기 보다는 기독교와 민족주의, 사회주의 사이 조화와 연대의 길을 취하고자 했다. 여러 계파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상부상조를 기본 이념으로 한 이상촌 건설을 위해 진력했다”고 말했다.

손 목사는 임시정부와 절연 이후 길림으로 이주해 1927년 4월 1일 농민 중심의 독립운동 단체이자 일종의 협동조합체인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창설해 농촌의 교육, 영농기술 개발, 보건위생사업을 추진했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중에도 목사로서의 직분도 충실히 감당하여 그가 담임하는 길림 한인교회 내에 유치원과 공민학교를 설립, 교포 2세의 교육과 민족정신 고취에 전심하였고 몸을 돌보지 않고 교포사회 발전에 헌신하였다.

특히 손 목사가 만주 땅에 이주한 후 세운 첫 공적은 그와 호형호제 하는 사이로 알려진 안창호 선생의 구출작전이었다. 그는 동지 백영엽과 함께 중국 경찰에 의해 체포된 안창호 선생의 구출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며 마침내 안창호 일행도 무사히 풀려나게 된다. 손 목사는 이와 같은 헌신적인 활동을 벌였지만 ‘가츠라암살음모사건’으로 인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1929년 교회 목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3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의 장례는 재만 감리교회장으로 엄수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동포들의 손에 의해 길림성 북산(北山) 동쪽 기슭에 묻혔다가 1996년 9월 11일 국내로 봉환돼 12일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96년 9월 11일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이 교수는 “손 목사는 ‘죽이는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살리는 운동’으로서 민족운동을 추구했다”며, “이 같은 그의 평화와 공존 의지는 기독교와 상극 관계를 취하고 있던 사회주의까지 포용해 ‘기독교사회주의’이념으로 형성·발전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이 같은 기독교 사회주의 개념이야말로 한반도 현대사를 갈등과 분쟁으로 몰아놓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념 갈등을 위한 창조적 대안”이라며, “반세기 넘게 분단의 현실을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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