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침략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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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침략 당하게 됩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9.08.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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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기획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⑳ 물산장려운동 이끈 조만식 장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경제 전쟁을 시작했다. 아베 내각은 지난해 우리나라 대법원이 일본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기업의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판결을 한 데 대해 유례없는 보복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 3일에는 백색국가에서 우리나라를 제외시켰고 더 강력한 보복도 예상되고 있다. 

과거사에 대해 통렬히 반성해도 부족한데도, 일본 정부가 저지르는 뻔뻔함을 보며 우리 국민들은 크게 분노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 달 이상 전국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자발적 불매운동이 주목된다. 젊은 세대까지 적극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때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으로 한반도를 달구었던 고당 조만식 장로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민족자본 육성을 위해 국산품을 이용해야 한다는 고당의 외침이 지금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다. 

고당, 기독교 신앙을 만나다
1883년 평양에서 출생한 고당은 한학을 공부하다 사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서당 동기였던 한정교의 도움으로 22세(1904년) 기독교인이 되었다. 5척의 작은 키, 주당이었던 조만식은 당장 술 담배를 끊고 늦은 나이에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0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했고, 1911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한 도쿄한인교회를 설립해 초대 영수로도 활동했다. 1913년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준비했지만 그는 남강 이승훈 선생의 초청으로 민족인재의 산실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2년 후 오산학교 교장이 된 고당은 24시간 학생들과 함께했다. 고당은 오산학교에 재직할 때부터 국산품을 애용했다. 외산품으로 허영심을 채우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교장의 권위보다 학생들과 같은 규율을 지키고 허례허식을 피했다. 빡빡 깎은 머리, 검정색 무명 두루마기와 말총모자, 천으로 된 편리화는 그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 물산장려운동 홍보를 위한 당시 거리행진

사감까지 겸했던 고당은 1919년 3.1운동을 위해 교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보수로 제자들을 길러냈다. 교장직 사임은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하도록 남강 선생과 한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당은 만세시위 후 상해로 가던 중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고 결국 1년형 징역형을 언도 받고 고초를 당했다. 

‘조선물산장려회’ 설립, 전국으로 확산
1920년대 고당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하나로 모으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공산주의가 퍼져가는 때에 고당은 기독교 신앙을 밑바탕에 둔 사회운동으로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이었다. 그 중심에는 산정현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22년 산정현교회 3대 장로로 장립한 고당은 오윤선 장로와 함께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일제가 3.1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한 이후 새로운 독립운동이 요구되는 때에 물산장려운동은 국민들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금주운동, 금연운동, 폐창운동 등은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는, 단순히 캠페인이 아닌 사회변혁운동이었다. 고당은 물산장려운동으로 민족자본이 반드시 축적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독립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확신했다. 

고당은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실제 삶 속에서 국산품을 애용하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이 때부터 그는 ‘조선의 간디’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저축조합을 만들고 모아진 자금으로 실제 산업시설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도 조직했다. 끝내 민립대학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민족교육이 왜 필요한지 전국을 다니며 알리고자 했다. 그는 평양으로 돌아와 고아원과 양로원, 도서관 등을 만들었다. 1936년에는 마산에서 사역하던 오산학교 제자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로 청빙해 오기도 했다. 

▲ 조선물산장려회 10주년 포스터

“한 알의 밀알이 된 고당, 이제 열매로”
안타깝게도 일제는 고당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1937년 조선물산장려회를 해체해 버린 것이다. 이듬해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주기철 목사가 투옥됐을 때, 그는 오윤선, 방계성, 유계준 장로 등과 함께 산정현교회를 지켰다.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했다. 도산 안창호가 일제 고문으로 사망하자 억압 속에서도 묵묵히 장례위원장을 역임했다.  

1944년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서 순교한 후 그는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에는 평양에서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이후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1946년 소련군에 의해 연행됐다. 결국 1950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순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 한경직 목사는 “고당은 북한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다. 북한 땅에 떨어진 고당을 비롯한 많은 애국 동지들의 밀알들은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많은 열매를 맺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고 생전 언급했다. 

90년 전 고당이 온 겨레와 함께했던 큰 뜻은 이제는 우리가 이뤄내야 할 목표가 됐다. 그 이유에 대해 고당은 이미 우리에게 말해 둔 것 같다. 

“우리 조선 사람의 생활이 이처럼 궁핍하게 된 것은 민족적 무자각으로 인해 제 것을 천시하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국의 침략을 자신도 모르게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국산품을 많이 만들어 써야 합니다. 우리가 국산품을 애용해 나가면 자연히 생산이 증대될 것이고, 우수한 산업 국가가 되어 마침내 민족 경제의 자립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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