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원리’에 토대를 둔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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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원리’에 토대를 둔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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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1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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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와의 유사성 토대로 발전

이정순 박사의 이란여행기 ③

▲ 이정순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중동연구원)

파르티아(오늘날 이란 북동부) 왕조는 500년 가까이 존속했지 만 뒤를 이어 사산 왕조(Sassan, 224~652)가 세워졌다.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시르 1세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하여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란에서 이슬람교는 주로 도시 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그 원인은 이슬람이 포교과정에서 무슬림이 보여준 관 용, 지역적, 역사적 그리고 종교적 속성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의 제도와 문화를 통하여 국가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아랍이 이란을 지배한 후에도 이란인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이란의 교육,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이 이슬람의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 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1935년 3월 21일 팔레비 왕 조(1925~1979)의 ‘레자샤’ 국왕은 페르시아란 이름을 폐기하고 ‘이란(아리아인의 땅)’으로 바꾼다. 그러나 근대 이란은 카자르 (Qajars) 왕조(1795~1925) 시기부터이며 아그하 모하마드 칸 (Agha Mohammad Khan)은 카자르 왕조를 연 뒤 테헤란으로 수도를 옮겼다. 1차 대전 중 이란은 영국, 러시 아, 터키군의 전쟁터가 되어 짓밟혔다. 코사크 부대 사령관인 레자 칸(Reza Khan)은 팔레비 왕조 (1925~1979)를 열어,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에 들어간다. 레자 샤는 이슬람의 종교적, 전근대적 사고방식 대신 세속적, 서구적, 합리적, 근대적 국민 의식을 상승 시키려 했다. 이것은 이슬람은 종교만이 아니라 문화, 사상, 사회 그리고 정치가 통일체제이기 때문이다. 레자 샤는 1936년에는 여성들의 차도르를 없앴고, 개혁을 밀어 붙이기 위해 반대 세력과 언론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근대적 사법 체계를 도입하므로 봉건적 특권을 박탈당한 이슬람 세력은 팔레비 왕조의 적이 됐다. 팔레비가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왕가와 이슬람 성직자들의 대립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촉발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근본적으로 레자 샤의 근대화 정책에 드는 비용도 농민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슬람 혁명의 구호는 자주, 자유, 이슬람공화국이다. 이슬람 보수파 호메이니가 1979년 2월1일 귀국하여 2월 11일 이슬람혁명을 일으켰다.

그 결과 팔레비 왕조가 멸망하고 4월 1일 대표적인 쉬아파 공화국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란 이슬람 공화 국 헌법은 전문 제14장 제175조 로 구성되어있다. 헌법 전문에는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이슬람 원리에 토대를 둔 이란 국민의 문화, 사회, 정치 및 경제의 기초가 된다’라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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