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아니면 대한의 독립은 없습니다”

‘강화의 바울’ 이동휘 선생,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인창 기자l승인2019.07.10 16:27:54l수정2019.07.10 16:48l14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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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强)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이동휘 선생(사진)이 을사오적 척결을 다짐하며 쓴 유고에는 이 선생의 신앙과 애국심을 있는 그대로 들여볼 수 있다. 이동휘 선교사에 대해 당시 케이블(E.M.Cable) 선교사는 ‘강화의 바울’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국가보훈처가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1873.6.20.~1935.1.31.)의 생애와 신앙이 주목받고 있다.

이동휘 선생은 황경남도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해 한성무관학교에서 수학한 후 26살 나이에 강화도 진위대장(1902년)으로 부임할 정도로 능력 있는 군인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사직하고 을사오적 처결에 나섰다.

1905년에는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온동에 헌신했다. 보창학교 이름은 고종이 직접 지어준 이름일 뿐 아니라 왕실지원금까지 보내주었다.

비슷한 시기 이동휘는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김우제 전도사를 통해 신앙을 접했으며, 서울 상동교회에서 여러 기독 독립운동가를 만나면서 기독교야말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복음전파에 힘썼다.

이동휘 선생은 로버트 그리어슨 선교사를 도우며 강화도와 서북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또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퇴위에 항거해 강화도에서 기독교인들을 규합해 저항운동을 하다 체포됐다.

이후 서북학회와 비밀결사 신민회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전도사로서 북간도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3월 안명근·양기탁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총감부에 체포돼 인천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913년 2월 결국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한 그는 북간도 한인자치기관 간민회를 지도하는 한편, 1919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직에 취임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동휘 선생은 안정된 체제에서 방안을 찾는 정치가라기보다 혁명적 방법에 의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닌 민족혁명가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력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 1995년 뒤늦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그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독립운동을 위한 공산주의를 택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사회주의계열 인사 중 첫 유공훈장이 수여됐다. 이동휘 선생은 1935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던 중 러시아에서 병사했다.

 

이인창 기자  tackle21@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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