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어 독립위해 ‘교육과 언론’에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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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어 독립위해 ‘교육과 언론’에 투자
  • 이성중 기자
  • 승인 2019.07.0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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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에서 민족 대표로 이명룡 장로

이명룡은 1873년 8월 2일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면 유정리에서 6남매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 호는 춘헌(春軒)이다. 그의 부친인 이창엽은 이명룡이 12세가 되던 해인 1884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어지자 15세에 이웃 동네에 사는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그는 5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면서 근면이 몸에 밴 상태로 20세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도 뽀죡히 생계를 이어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아버지 친구이며 같이 장사를 했던 분을 만나 고민을 애기하던 중 같이 장사를 하기로 결심, 전답과 집을 처분하고 고향인 철산을 떠나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하단 동으로 이사했다.

 

타고난 장사 수완으로 재산 축적

부친의 장사 수완을 물려받은 이명룡은 무명이나 삼베를 헐값에 사들여 이윤을 붙여 판매했다. 거래처는 정주를 비롯해 선천, 구성, 박천에 이르는등 광범위했다. 사업이 번창해 현금이 많아지자 재산가로 소문이 난 이명룡은 담보를 받고 현찰을 빌려 주는 대금업에도 진출, 막대한 돈을 벌게 됐다.

하지만 이명룡의 속내는 대금업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조선의 미래를 위해 청년을 세우고 교육을 진흥시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학교 기성비 조성에 많은 기부를 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1902년 그는 정주군 상업회의소 회두(會頭:소장)에 추대되어 식산흥업과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기독교와 인연

이명룡이 기독교를 접하게 된 시기는 1900년 즈음으로 고향 친구인 유상도가 기독교인이 되어 그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이명룡은 유상도를 통해 철산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알게 되었고, 예수에 대한 복음도 함께 듣게 됐다.

그는 유상도에게서 받은 쪽복음서인 누가복음을 읽고 또 읽었다. 얼마 후 이명룡은 정주읍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1902년 30세의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이명룡은 세례를 받은 이 후 주일성수를 반드시 하는 등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다.

           “주일 성수와 장사 중 하나만 고르라” 요구에
              동업자와 결별하고 안식일 철저히 지켜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어느 날 동업자가 이명룡에게 교회를 그만 두던가 장사를 그만 두던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이명룡은 동업을 못했으며 못했지 안식일을 어길 수 없다고 말 하며 아버지의 친구인 동업자와 결별했다. 이후 이 명룡은 다시 가게를 열고 장사를 했으며, 주말까지 장사를 하는 동업자의 가게보다 주일에 쉬는 이명룡의 가게에 더 많은 손님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투옥 중 성경 통독으로 신앙고취

1907년 4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 복을 위한 항일비밀 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조직 됐다. 정주 일대의 유지인 이명룡은 1908년 3월 지회장 이승윤의 권유로 신민회에 가입했다.

이후 이명룡은 정주읍교회 담임 최성주 목사와 여러 인사들과 더불어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주지방 신민회 지도자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1909년 10월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 미가 암살된 이후 총독부는 조선인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강화했으며, 미국인 선교사를 축출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모살미수사건’을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총 389명의 연루자 가운데 123명을 기소했으며 제1심에서 105인에게 유죄를 내렸다.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명룡 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1년 6개월가량 투옥된다. 그는 투옥이 되어 있는 가운데 틈만 나면 성경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시간을 가졌다.

▲ 일제가 이명룡 장로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카드.

 

3·1 독립운동 민족대표로 참여

이명룡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있다가 무죄 선고를 받고 출옥한 이후 교회일과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그는 1917년 장로로 장립된 이후 계속 평 북노회에서 총대로 참석 교회일에 충실히 임했다.

그러던 가운데 1919년 2월 4일 평북도사경회 참석차 선천에 간 이명룡은 숙소에서 이승훈에게 3·1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모든 것을 이승훈에게 일임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종로경찰서 경찰들에게 체포됐으며, 1919년 3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은 후 출판 및 보안법 위반협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 다. 이명룡은 1921년 11월 4일 형기를 마치고 17명의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출감했다.

 

출옥 후 종교·산업·교육에 앞장서다

이명룡은 옥중에서 기도와 성경일기로 시간을 보냈다. 성경을 40독한 이명룡은 오랜 시간 기도와 말씀을 통해 신앙이 한층 깊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교육계 및 언론계에서도 이명룡은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그는 1930년 정주군 학교평의원이 되었으며, 1932년 2월에는 동아일보 정주지국 운영 참여하면서 언론인으로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평북지역의 자산가였던 그가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금원이 되었으며, ‘105인 사건’과 ‘3·1독립운동’ 을 계기로 투옥되면서 그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더 불어 독립운동가로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또한 해방 이후 노회와 사회활동은 물론 지방의 청년들을 지도하며 민족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등 왕성한 활동를 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이명룡은 1956년 11월 젊은 학생들에게 3·1정신을 심어 주겠다고 서울로 강연을 왔다가 11월 12일 새벽에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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