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방법과 예수님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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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방법과 예수님의 방법
  • 승인 2004.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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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인류의 소망이었고 한국 민족과 교회의 소망이었다. 부활은 어두움과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부신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크게 술렁이고 있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아우성으로 국론이 양극으로 분열되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극도로 혼란한 현 시점에서 어두움과 죄악의 세력을 깨뜨리신 예수님의 방법과 베드로의 방법을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첫째 베드로는 어두움의 세력이 다가올 때마다 증오와 대결의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화해의 방식을 취했다. 한 번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을 때 제자들은 분을 품으면서 저들을 불로 멸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적대 세력에 대한 제자들의 적개심을 가라 앉게 하시려고 “용서하라 용서하라”는 말씀을 수 없이 하셨다. 미움은 둘 다 죽게 하지만 용서는 둘 다 살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베드로는 어두움의 세력이 강하게 다가왔을 때 그 세력과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분노의 칼을 빼어 들었다.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 편 귀를 베어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때에도 증오와 대결의 방법이 아닌 사랑과 온유의 방법으로 맞섰다.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충고했다. 그리고는 말고의 떨어진 귀를 다시 부쳐주셨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셋째 베드로의 마지막 모습은 도망이었다.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혈기를 부리고 증오하며 대결하던 베드로는 마지막에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죄 값을 스스로 짊어지고 희생과 죽음의 장소를 향해 걸어가셨다. 베드로는 도망쳤지만 예수님은 어두움과 죄악의 심장부를 향해 걸어가셨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화해와 희생과 죽음의 방법으로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 세상에 빛을 가져오셨고 죄와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의와 생명을 가져오셨다.

이제 극도로 혼란한 오늘의 정국을 어떻게 헤쳐 나아가야 하겠는가? 자기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여당을 미워하고 대결하여 싸우는 극단적인 방법이나 야당을 미워하고 대결하여 싸우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라를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암울했던 지난 시대를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비슷한 삶의 방식으로 사신 교회와 민족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있다. 조만식 장로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그는 한 번도 ‘왜놈’이니 ‘일본 놈’이니 하는 상스러운 말을 쓰지 않았고 해방 후 일제보다도 악랄한 공산치하에서 반탁투쟁에 앞장 서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에 그의 생명을 민족을 살리는 제물로 바쳤다.

우리도 미움과 분노로 국론이 양분되어 있는 우리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첫째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미움과 분노는 국론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망치기 때문이다. 둘째 무력으로 대결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와 민주의의 정신은 대결이 아닌 화해이고 폭력이 아닌 대화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셋째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라의 죄 값을 모두 함께 짊어져야 할 것이다. 희생이 요구되면 희생을 감수하고 생명이 요구되면 생명까지 바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김명혁목사/강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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