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시작했던 한국장로교회 교권으로 ‘분열’ 거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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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시작했던 한국장로교회 교권으로 ‘분열’ 거듭
  • 장종현 목사
  • 승인 2019.05.0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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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현 목사의 개혁주의생명신학 7대 실천운동 3) 회개용서운동(2)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분열입니다. 먼저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나뉨이 많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모두가 인정하면서도 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매우 아픈 문제입니다. 다른 교파들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성도가 가장 많은 장로교회의 경우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분열이 심각합니다.
 
130여 년 전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전함으로 한국장로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조선에 왔고, 이듬해 4월 5일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같은 해 6월에 헤론 의사 부부가 들어와서, 이들이 조선에 미국 북장로회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때 선교회는 교인에게 신앙 문답을 하고 세례를 줄 때 그를 그 선교회가 속한 자국 교회의 회원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1889년에 호주 장로회의 데이비스가 입국하여 그 해에 두 선교회는 조선에서는 동일한 신앙을 가진 선교회들이 연합해서 한 장로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 연합공의회를 조직했습니다. 1892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했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입국해 가입함으로 연합공의회는 네 장로교회 선교부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1900년에는 연합공의회가 치리권도 갖게 되었지만, 입교인은 여전히 선교 모교회에 속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목사를 배출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때 조선 목사를 장립하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조선노회를 설립하거나 아니면 각 선교회 본국노회에 속한 목사로 장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연합공의회는 조선장로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서 조선장로회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이것은 연합공의회가 조직 초기부터 가장 주된 목적으로 삼았던 단일 한국장로교회 설립 염원과 조선 목사 장립이라는 목전의 문제를 단번에 풀어내는 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이렇듯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각자의 모교회가 서로 달랐지만 조선에는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단일 장로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런 뜻을 가진 장로교 선교사들은 교파를 넘어서서 감리교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성경번역과 찬송가 출판 등 문서선교와 교육선교 분야에서 연합사업을 벌였습니다. 

1905년에는 조선 땅에 하나의 개신교회 ‘대한예수교회’를 설립하려는 운동까지 벌였습니다. 우리는 교회 입구에 걸린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간판을 볼 때마다 선교사들의 고귀한 소망과 유산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로 시작한 한국장로교회가 오늘날처럼 갈라진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일제 강점기 혹독한 압제 아래서도 하나의 교회를 유지하던 한국장로교회는 1950년대에 분열했습니다. 1951년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고려파가 총회측과 갈라졌고, 1953년 기장측이 분립했으며, 1959년에는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했습니다. 

고려파의 분립은 신사참배를 한 친일파 목사들이 경남노회의 주도권을 잡으므로 ‘출옥 성도’들이 노회 탈퇴를 선언하고 새로운 노회를 조직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장측의 분립은 보수주의 신학사상과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차이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 요인은 복합적이었는데, 박형룡 목사의 신학교 부지 구입비 부정지출 사건과 WCC 탈퇴 문제, 그리고 제44회 대전총회에 참석할 경기노회 총대 선정 혼란 사건 등이 얽혀 있었습니다. 

신학 노선의 차이보다는 교권 다툼이 결정적 문제였기 때문에 두 교회는 다시 하나의 교회로 되돌아가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 뒤 수년 간 몇 차례 연합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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