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의 중용적 종교개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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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의 중용적 종교개혁(2)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5.0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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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영국의 종교개혁(12)
이렇게 해서 헨리 8세의 모든 권한이 엘리자베스에게 주어졌다. 그리하여 영국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한 자주 왕국임을 재천명하고 영국의 종교정책을 ‘et cetra’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렇고 또 저렇고’라는 뜻이어서 어떤 정책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에드워드 6세가 1552년에 제정한 ‘제2 기도서’를 개정하여 채용하기로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이 기도서를 성직자회의에서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한 성직자 200명이 파면되었습니다.

이 개정된 기도서에 따르면, 미사와 모든 예배에서 영어를 사용하고, 성만찬 예식에서 평신도들에게 떡과 잔을 다 돌리게 했습니다. 또 성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식이니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의미하는 말을 금지하였습니다.

연옥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며,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지 말 것이며, 성직자의 의상을 간소화하고, 신부라는 말 대신 목사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며, 성찬대를 제단이라 부르지 말고 식탁이라 부를 것이며, 성만찬 의식을 ‘감사 예전’이라고 부르지 말고 ‘기념 예전’이라고 부를 것 등을 명시했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이러한 신학은 츠빙글리의 신학을 본뜬 것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성공회 제도의 확립을 강력하게 반대한 세력은 가톨릭 신도들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파문을 미루다가 1570년 2월 25일 교황 피어스 5세에 의해서 발동시켰습니다. 심지어는 암살까지 허용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맞서서 엘리자베스는 반교황법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였습니다.

이것은 영국 내 가톨릭 신도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여 그들이 불이익을 받게 하였고, 그들은 잠재적인 반역자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반국가와 반여왕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재임 동안 가톨릭 신자 200명 이상이 사형 당했습니다. 특히 예수회 수도사들이 반국가 음모를 계략 하였었습니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비밀협정을 맺고 영국을 정복할 계획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로 알려진 강력한 아르마다 함대가 영국 해협을 침략하여 들어왔습니다. 영국이 약세였으나 이때 강한 폭풍이 불어와서 영국 함대가 유리한 상황에서 적함을 대패시켰다.

이때부터 스페인 함대는 무력하게 되었고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영국 해군이 해상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또한 그 힘으로 영국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 대륙으로 식민지 개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빼앗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엘리자베스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로마 교황권과 로마주의 신앙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했던 과거의 영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개혁과 더불어 뿌리를 내린 영국 국교회는 엘리자베스의 대외 전략에 맞추어서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하게 기울어지지 않았으며, 어느 쪽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뱅주의를 따르지만 예배 모범과 교회 조직에서는 가톨릭 모범을 많이 반영한 복합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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