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앙의 조화 꾀한 ‘유신진화론’…신학적 쟁점 산재
‘죄와 죽음’·‘아담론’ 부딪혀…“신앙과 조화되기 힘들다” 의견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66권의 시작을 알리는 창세기 1장 1절이다.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분명하고도 간결한 선언으로 성경은 문을 연다. 오랜 기간 창세기 1장 1절과 그 뒤로 펼쳐진 하나님의 창조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시작해 6일째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7일째에 안식하시기까지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주류 과학계에선 하등생물이 진화를 거듭해 지금의 인류가 됐다는 진화론이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성경의 연대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지구의 나이가 1만년 안팎이라 믿는 이들은 학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신앙인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과학의 발견과 우리의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고민 끝에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된 것이 맞지만 최초에 하나님의 창조가 있었고 진화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이뤄졌다’는 ‘유신진화론’이 탄생했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성경이 기록한 하나님의 창조와 진화는 결코 조화될 수 없다는 것.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은 지난 15일 과천소망교회에서 제75회 월례포럼을 열고 유신진화론에 대해 신학적으로 비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창조과학회장 한윤봉 교수(전북대)와, 김병훈 박사(합신대), 우병훈 박사(고신대)가 발제자로 나섰다.
유신진화론이 뭐길래
유신진화론은 이름 그대로 ‘하나님을 믿지만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인 것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지구의 나이가 약 46억 년이고 오랜 시간에 걸쳐 하등 생물이 고등 생물로 진화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
비교적 보수적인 신앙 색채를 가진 우리나라에선 유신진화론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을 ‘타협’이라 비판하며 신앙을 포기한 것처럼 묘사하는 한국과는 달리 세계적으로는 이미 논의의 역사가 깊다. 과학자로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주역 프랜시스 콜린스와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 등이 유신진화론자로 잘 알려졌고 세계적으로 저명한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신진화론이 계속해서 뜨거운 감자인 이유는 뭘까. 과학의 영역은 과학자과 후대의 몫으로 남겨두더라도 신학적으로도 쉽게 풀리지 않는 쟁점들이 산재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죄와 죽음’, 그리고 ‘최초의 인간, 아담’ 문제가 유신진화론이 쉽게 해결하기 힘든 신학적 쟁점으로 꼽힌다.
쟁점 1 : 죄와 죽음
성경은 최초의 인류 아담의 죄로 고통과 죽음이 시작됐다고 기록한다. 전통적인 창조론 역시 아담과 하와는 무죄한 사람이었으며 아담의 죄의 결과로 죽음이 시작됐다고 믿는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에서는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에 죽음이 없었다는 것은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첫 번째 균열이 발생한다.
김병훈 박사는 포럼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비롯해 교회는 일관되게 아담의 무죄성과 그의 원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제시한다”며 유신진화론과 우리의 신앙 고백은 조회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신약 성경의 기록에 비춰봐도 유신진화론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김 박사의 주장이다. 그는 “신약성경에는 ‘죄의 값은 사망(롬 6:23)’이라고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롬 5:12)’고 말하고 있다”며 “이는 구원론과도 연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쟁점 2 : 최초의 인간, 아담
만약 하등 생물이 점차 고등 생물로 진화했다면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라는 성경의 기록도 모호해진다. 유신진화론에선 아담과 하와도 그들을 낳아줄 부모가 있어야 하기 때문. 유신진화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첫 번째 인류’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나아가서는 종교적 상징에 불과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유신진화론자 데니스 알렉산더의 주장을 중심으로 아담론을 분석한 우병훈 박사는 “만약 아담이 최초의 인류가 아니고 아담으로 인해 죄와 죽음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아담 이전의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기독교 교리에서는 인간만이 영혼이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진화 단계에서 어디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정의할 것인가. 유신진화론은 여기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우 박사는 또 “아담 이외에도 동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아담의 자손도 아닌 이들이 왜 아담의 타락으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지 모호하다”며 “유신진화론자들은 창세기 1~3장을 비유적 의미로 해석할 때 벌어지는 기독교 핵심교리들과의 충돌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건강한 토론 계속 이어져야
이날 포럼에서 논평을 맡은 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장)는 “많은 이들이 유신진화론이 기독교 신앙과 조화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오늘 발제는 전혀 그럴 수 없음을 보여준다”며 “이는 유신진화론자들의 아담론은 기본적인 전제에서부터 성경 및 전통적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우병훈 박사가 다룬 데니스 알렉산더는 탁월한 과학자지만 신학자는 아니다. 알렉산더의 주장을 중심으로 유신진화론의 아담론을 비평하는 것엔 태생적 한계가 있다”며 “창조 기사는 변증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 본질이다. 유신진화론자들과도 신앙 안에서 건강한 토론이 지속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논평을 이어간 허정윤 교수(케리그마 신학연구원)는 “기독교가 신학적 관점으로 유신진화론을 비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아담과 관련한 창세기의 해석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보다 은유적 의미를 찾는 관점이 더 많이 있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창세기는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