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개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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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개혁(1)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2.2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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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영국의 종교개혁(3)

각 나라마다 대표적인 개혁자가 있습니다. 독일에는 루터, 스위스에는 츠빙글리, 프랑스에는 칼뱅이 있는데 영국에는 헨리 8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독특하게 영국은 개혁자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생각이 납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는 난봉꾼으로서 복잡한 여성 편력과 여섯 번의 결혼으로 유명합니다. 결국은 성병으로 죽고 마는데, 그의 생활은 굉장히 조잡했습니다.
 
물론 그는 왕자를 낳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성도착자 같은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혼하고 싶어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결별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국의 종교개혁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대단한 것입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1491-1547)는 18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왕후는 스페인 왕실의 공주였는데 헨리 8세의 형 아더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과부가 된 여자, 곧 그의 형수 캐더린이었습니다.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부친 헨리 7세는 과부가 된 캐더린이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이 탐났다기보다는 그 돈이 필요해서 캐더린이 시동생 헨리 8세와 약혼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결혼은 가톨릭교회의 일곱 가지 성례전 가운데 하나가 되는 신성한 성사(聖事)였습니다.

헨리 7세는 헨리 8세와 캐더린의 결혼 허가를 로마 교황청에 신청했는데 교황은 정치적으로 배려하여 결혼을 허가했습니다. 이때 헨리 8세는 겨우 13세였고 캐더린은 19세였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 초기 서로 사랑하였고 아이를 몇 명 낳았는데 다 죽고 여식 메리만 살아남았습니다. 헨리는 자기의 왕위를 이을 아들을 갖기를 원했으나 캐더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캐더린과의 결혼이 잘못된 것이어서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줄로 생각하고 있을 때 33세의 헨리 8세는 캐더린의 시녀였던 20세의 앤 볼린이라는 매력적인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헨리 8세는 캐더린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그의 신도들의 양해를 얻어 캐더린에게 이혼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캐더린이 이혼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자 문제가 오랫동안 복잡해졌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의 이혼 청원을 허가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성사(聖事)의 하나인데 이혼은 그 성사를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헨리 8세는 요크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인 토마스 울지(1473-1530)를 앞세우고 교황청의 허가를 재촉하였으나 우유부단했던 로마 교황은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울지는 분명하게 국왕의 이혼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왕의 신임을 잃고 말았습니다.

헨리 8세는 추기경인 토마스 울지에게 요크의 대주교라는 직함만 남긴 채, 자신의 관저와 토지 등 모든 재산과 관직을 박탈시켰습니다. 사실 1514년 이래 요크의 대주교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애 한 번도 요크를 밟아보지 못했던 울지는 노구를 이끌고 낯선 지방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결국 허약해진 심신을 이기지 못한 울지는 1530년 11월 29일 레스터에서 호송 도중 죽고 맙니다. 그의 나이 55살이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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