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의 인물 - 모진고문 속 면류관 얻은 허성도목사 (1902-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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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의 인물 - 모진고문 속 면류관 얻은 허성도목사 (1902-1944)
  • 승인 2004.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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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 죽으면서도 외친 “예수재림”

만세운동이 있던 1919년 개성학교 졸업반인 17세 청년 허성도는 선봉에 서서 시가행진을 하다 일경에 체포, 1년간 옥살이를 치렀다. 출감 후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그가 선택한 길은 일본 유학의 길. 신학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청년 허성도는, 하지만 목사로 거듭난 이후에도 나라사랑 애국신앙을 더 깊게 승화하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에 맞서 허목사가 주장한 것은 ‘예수재림’. 설교할 때마다 강조한 예수재림이 문제가 되어 1944년 결국 투옥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고문기술로 유명한 일제는, 허목사를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를 섞은 물을 마구 붓는 한편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꽂아 비틀면서 “예수가 다시 오는지 어떻게 알아!”라고 다그치자 “성경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며 연거푸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질세라 일경은 허목사 손톱 밑에 송곳을 찌르면서 “그래도 예수가 오느냐?”고 계속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고문에 고개 숙일 줄 모르는 허목사에 대해 일경은 몽둥이로 때리기를 몇시간, 잠도 재우지 않고 고통을 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허성도목사는 재판부로 이송됐고, 징역10월의 형을 받았다. 대전형무소로 송치된 허목산는, 일제가 주는 매끼니 밥이 너무 적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배고픔에 정신이 몽롱한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일경들이 하는 말은 “신사참배하고 예수재림을 부인하면 밥도 더 주고 석방하도록 하겠다”는 유혹의 말들. 일경은 계속해서 “신사참배한 이후에 교회에서 설교한들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며 회유했고 “너무 고집이 세면 살기에 힘들다”고 말했다.

허목사는 그에 대해 “차라리 죽을지언정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생활은 못한다”고 버티다가 결국 1944년 42세의 나이로 아사(餓死)했다고 전해진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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