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시대를 찾아 온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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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시대를 찾아 온 부활절
  • 승인 2004.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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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시대에 새 생명을 선포하라

이제는 자살(自殺)이 범죄가 아니라 척박한 삶을 청산하는 도피처로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만큼 관대해졌다는 얘기다. 대북 송금문제가 사회 정치적인 이슈로 떠오르며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자 현대 사장이 투신자살을 ‘문제해결 수단’으로 선택했는가 하면, 최근에는 정경유착의 오랜 관례가 겉으로 드러나면서 대우 사장이 한강에 몸을 던져 투신하는 극단을 선택했다.

청소년층은 그들 나름대로 왕따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괴로움을 해결하는 상황이고, 교사들은 학생들 사이의 왕따문제를 해결 못한다는 비난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흡연했다는 이유로 꾸지람을 받은 학생이 학교 인근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투신이라는 방법으로 ‘항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빚 독촉에 시달린 채무자가 가족 동반 자살을 선택하는가 하면 어린 두 딸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한 어느 비정한 어머니 이야기도 매스컴을 탔다. 심지어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만들어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결연한 의식(儀式)을 치루기도 한다.

이제 자살은 마치 건조한 산을 황폐화시키며 삽시간에 시커먼 숯덩이로 뒤바꿔 버리는 불처럼, 계층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온 사회를 오염시키며 삶에 대한 의욕을 가진 사람들 마저 생명에 대한 애착을 마비시키는 중이다. 저항력을 잃은 유기체 속에 들어온 독종 바이러스가 전 유기체의 생명력을 집어 삼기는 현상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사실 자살은 국가간 종족간에 벌어지는 전쟁과 비교할 때 대동소이하다. 살아남기 위해 전쟁과 전투를 치루는 것임에도,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지역을 뚫고 전진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단지 개인적인 문제를 안고 죽음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민족과 국가적인 문제를 안고 가느냐의 차이점만 있을 뿐 스스로 죽음인 줄 알면서 간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여기에 정신질환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자살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최종적으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을 정신질환자로 매도할 수는 없지만, 생명의 전화(대표:하상훈)가 내놓은 통계는 자살사건 중 우울증 환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보여준다. 최근 생명의 전화가 운영하는 상담 가운데 자살위기 때문에 상담하는 건수가 12%에 달한다고 한다. 또 우울증 환자 6명 중 한 명이 자살을 선택하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과 함께 자살을 선택하는 5명 중 평균 4명이 우울증을 앓는 치료 중인 환자라는 사실까지 접하고 보면, 우리들이 이미 목도한 갖가지 자살 사건들 속에 혹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울증 환자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살을 정신질환적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으나 현대인들이 갖는 스트레스가 자살로 연결시키는 죽음의 시초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래서 현재 각 의료기관들은 자살을 죄의 영역에서 다루는 소극적인 방법보다는 정신건강이라는 관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치료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상훈 원장은 “현대사회의 경쟁적 분위기가 스트레스를 양산하고 이 스트레스가 누적됨으로 죽음이 다가온다”고 밝히며 자살예방 교육의 하나로 스트레스를 잘 푸는 방법에 대한 관심을 강조한다.

부활절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인간들에게 새로운 삶과 생명을 주신 점을 선언한다. 이 부활선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협의나 의논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이다. 모두 어두운 죽음 속에 있던 우리들을 일방적으로 밝음으로 끌어 올리신 사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살은 교회가 반드시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대응해야할 영적전쟁의 대주제임에 틀림없다. 죽음의 상징인 어두움과 사악함을 격퇴시키고 대적해야하는 밝음의 상징이 부활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침체와 정체의 늪을 타개하려는 몸부림으로 성장지상주의에 또다시 빠져들고 있다. 새로운 교회건물을 짓느라 분주한 교회들이 많아지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성장은 양육이어야 한다. 성장은 성숙의 다른 표현이어야 한다.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으면서 생각은 어린아이인 사람을 우리는 ‘비정상’이라고 부른다. 거대한 외관을 자랑하는 교회들이 적지않은데 사회적으로 스스로 죽음을 향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는 한국교회가 정상을 향하기보다 비정상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살의 시대를 찾아온 올해 부활절은 자살을 사회적인 문제가 아닌 영적전쟁의 문제로 인식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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