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 이전의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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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이전의 개혁운동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1.0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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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137 프랑스의 개혁운동(1)

프랑스의 개혁 운동은 세 시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습니다. 초기의 개혁 운동은 파베르 스타풀렌시스라는 라틴어 이름을 가진 르페브르(1455~1536)와 같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르페브르는 중세의 신비주의를 수용하여 제도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에 도전하였습니다. 르페브르는 1512년 ‘바울 서신 주석’을 출판하고 1522년에는 ‘복음서 주석’을 출판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복음, 자유, 희락,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찬양하였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극찬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미신을 초래한다고 확신한 그는 1523년에는 프랑스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백성들 가운데 널리 보급하여 프랑스인의 가슴속에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심었습니다.

르페브르의 영향으로 지성인들 사이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믿고 생활하자는 운동이 번져갔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욤 브리소네, 피에르 카롤리, 루셀, 기욤 파렐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성경 중심적 사상에 감화를 받은 후,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고질적인 악습, 분별없는 성인 숭배와 성물 숭배를 비판하였고, 성부와 성령 하나님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정죄하였습니다.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프랑스 왕실은 1525년부터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와 그의 누이 마가레트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통치권이 약해졌습니다. 이 때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복음주의자들을 박해할 것을 요청하자 무력한 왕은 가톨릭교회의 압력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53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나고 개혁에 대한 과격한 주장들이 나타났습니다. 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는 1534년 10월 18일에 ‘플래카드(벽보) 사건’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의 개혁자들이 투옥되었고, 35명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개혁 사상을 철회하고 귀국하는 자는 용서할 것이며, 츠빙글리파를 제외하고는 박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가지 않았고, 개혁자의 진영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실책을 깨닫게 된 프랑수와는 결국 종교적 관용을 철회하고 박해를 택하였습니다. 그는 1540년 개혁자들을 재판하고 처형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1545년에는 추기경 프랑수와드 뜨르농의 주장대로 왈도파 교인을 3천 명이나 처형하였습니다. 

이러한 박해가 한창 전개되던 1546년 르페브르가 활동하던 모(Meaux) 지역에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으나, 이 교회는 얼마 후 박해로 인하여 최초의 순교자 장 레클렉을 배출하고 폐쇄되었습니다. 레클렉은 학식 있는 지도자도 아니고 단순한 일반 신자였지만 가가호호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이단자로 몰아 고발했고 체포된 레클렉은 잔인한 고문을 당한 후 서서히 타는 화염 속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이 날이 1525년 7월이었는데 그는 프랑스 종교개혁 역사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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